내가 n가지 꿈을 포기한 이유, 현실 편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인 꿈 셋을 포기하다

by MOON

지난번에는 내가 왜 '이상세계'의 꿈들(영화감독, 방송국 PD, 상담가 또는 심리학자)을 포기했는지에 대해 썼다. 이번에는 고학년 버전이다. 학년이 올라가면 현실 세계에서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뻗을 수 있는 범위가 어디이고 한계는 어디인지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상에서 현실로 돌아와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꾼 꿈이라고 다 '현실적'이지는 않다. 꿈이라는 건 원래 비현실적인 법이지.


jakob-owens-199505-unsplash.jpg '만들 수 없다면, 유통하겠어!' 라는 생각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영화 배급/투자사

4. 영화 배급/투자사

자, 이제 현실로 돌아오긴 했다. 돈을 벌 수 있고 현실적인 경쟁률을 가진 꿈을 꾸기 시작한 것. 사실 영화 배급/투자사에서 일하는 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라기보단, '영화'라는 매체를 놓고 싶지 않아서 정한 직업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좋아하니까 영화 배급/투자사를 가야지!' 라니.. 내가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를 파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만큼 영화에 미쳐 있었기도 했다(이런 중2병스러운 어휘는 부끄럽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 그랬다). 내 삶에서 영화를 빼면 남는 게 별로 없을 정도였던 때였으니까.

이 꿈은 엄청난 이유로 사라진 건 아니다. 배급과 투자에 큰 소명이 있었던 게 아니라 '영화'가 중요한 것이었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래도 만약 이 직업이 큰돈을 벌 수 있으면 고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따져보면 최저시급도 안 될 만큼의 연봉과 근무시간을 알고 나선 '굳이.. 이 길을 가야 하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아쉽기는 하다. 배급은 몰라도 투자 업무를 하면서 성장하면 영화계에 일조한다는 자부심도 생겼을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한 영화를 내 돈, 아니 회사 돈으로 키워가는 느낌?


씨네21 박찬욱.jpg 어릴 땐 씨네21에 나오고, 여기에 글쓰는 사람들이 다들 내 우상이었다.

5. 영화 기자

이 꿈은 내가 글쓰기에 흥미를 붙이면서 시작됐다. 『돌아보니 우리는』이라는 독립출판물을 내고, 습관을 들이면서 글 쓰는 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글쓰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를 땐 정말 막연하게 어려웠는데, 하나하나 완성해가면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잘 하고, 어떤 스타일이 잘 맞는지 알아가다 보니 글쓰기가 조금씩 쉬워졌다(나도 안다, 애송이의 자만 섞인 착각이라는 걸). 아무튼, 어릴 때부터 아빠가 구독하던 씨네21을 즐겨 읽었던 나는 자연스레 영화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내 우상이나 다름없는 김혜리 기자나 이다혜 기자의 글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그땐 몰랐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영화'와 엮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하는 게 왜 어리석은 선택이냐고? 다들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하지 않느냐고? 물론 그게 괜찮은 선택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가 내 업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분명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영화에 대해 글 쓰는 것도 즐겁고, 영화 콘텐츠를 읽고 보는 것도 참 행복하다. 그런데 그렇게 좋았던 취미가 '업'이 되어보니 혼란스러웠다. 내 유일한 취미가 사라졌기 때문. 취미 시간이 업무 시간이 되는 빡치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영화 기자는 영화를 볼 때 그냥 관람객처럼 보아선 안 된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는 영화관에서도 대사나 포인트를 메모 해야 하고, 영화 콘텐츠를 봐도 그냥 넘길 수가 없으니 에버노트에 저장해놓기 바빴다. 그렇게 되니 난 더 이상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 즐기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봐도 끝까지 감상하지 못하고 '이걸 소재로 쓰면 되겠다'라는 생각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으니. 영화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영화가 업이 되니 나머지 인생은 텅 비어 버렸던 것이다.

나중에는 영화 기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잡지의 에디터가 되는 건 어떨까, 고민했다. 하지만 '대학내일'에서 학생 에디터를 하면서 깨달았다. 기자가 된다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는 없다는 걸. 업무의 8할은 기획과 섭외 그리고 취재였고, 기사를 쓰는 건 2할에 불과했다(어떤 잡지사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어쩌면 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글을 쓰는 기자'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듯이 '내가 원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대기업 로고.jpg 퀴즈! 여기서 내가 떨어진 기업의 수는 몇 개일까? (...)

6. 대기업

먼 길을 돌고 돌아왔다. 나도 이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찰수록 돈과 안정성에 목매기 시작했고, 남들처럼 '평범한' 루트를 고민했다. '평범한'에 왜 작은따옴표가 붙었느냐 하면, 이 루트 또한 절대 평범하지 않기 때문. 대기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멀리서 지켜보았을 땐 '쉽지만 지루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치열한 고민 없이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단정 지어버렸다. 그런데 내가 직접 대기업을 준비해보니 절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야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그걸 메우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야 했다. 자기소개서부터 만만치 않다. 차라리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역량을 적는 건 쉽지, 성장 과정을 적으라느니(이런 구시대적인 질문을 아직도 하더라), 10년 후 회사의 미래를 적으라느니(자제분들 관리만 잘 해도 잘 될 겁니다) 의도를 알 수 없고 알기도 싫은 질문들이 참 많았다. 인적성은 또 어떻고. 내가 직무 공부도 아니고 이딴 걸 공부하고 있어야 하나, 싶은 언어/수리/공간/논리 문제를 잔뜩 풀며 빠른 시간 안에 맞추는 연습을 해야 했다. 하루 종일 걸리면 그나마 다행인 면접은 말할 것도 없고.

모르겠다, 대기업은 '내가 이런 걸 굳이 공부해야 하나'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 시간이 정말 아까웠다. 나는 지금 당장 현업에서 일을 하고 싶고, 일은 못 해도 최소한 관련 지식을 쌓으며 공부하고 싶었는데, 쓸모없는 자소서나 인적성을 공부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매번 들었다.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을 때의 허망함('내 밤샘은 어디로..')과 억울함('내 얼굴이나 보고 떨어트리지..')도 있었고. 어쩌면 나는 대기업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활동이나 스타트업에 지원할 때는 서류 전형에서 탈락한 적이 별로 없었지만, 대기업은 지원하는 족족 떨어졌다. '대기업용 자소서'를 쓰는 방법을 몰라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저 일을 하고 싶은 건데, 굳이 대기업용 자소서 작성법을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더이상 경쟁률을 뚫기 위한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년도 상반기를 준비하면서 나는 '평범하고 쉬운 길'이라고 생각했던 대기업을 포기했다.




밝아올 미래를 향해 치열하게 살아도 바쁜 인생인데 뭐가 이리 많은 핑계를 대며 살아왔는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진짜 좋으면 하지 말래도 꼭 하고,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좋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꿈 하나하나를 포기하는 과정은 곧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무언가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 소중한 과정이다.

아무튼, 이렇게 나는 여섯 가지 꿈을 포기했다. 고민도 포기도 쉽지 않았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2년 동안 치열하게 공부하고 또 고민했던 과정이 필요했으니까. 그럼 지금은 무슨 꿈을 갖고 사냐고? 스타트업에 들어가려 한다. 누군가는 코웃음 치거나('이 많은 꿈들을 포기하고 엄청난 길을 가는 줄 알았더니?') 안쓰럽게 바라볼지 모른다('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로 갈까..'). 여섯 가지 꿈을 갖고 또 포기하며 깨달았다. 세상엔 절대, 절대 나한테 딱 맞거나 쉬운 길은 없다는 것을. 어차피 미래는 다 막막하니까, 이 길이 내게 더 맞는 길인지 평생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도 꿈을 꾸고 포기하는 여러분, 안주하지 말고 다 같이 끊임없이 고민합시다!


p.s. 그런데 왜 '여섯 가지 꿈을 포기한 이유'가 아니라 'n가지 꿈을 포기한 이유'냐고? 나는 살아가면서 더 많은 꿈을 갖고, 다시 또 그만큼의 꿈을 포기하며 살아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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