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20세기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시대의 풍경을 체험하고 싶을 때 20세기 영화를 찾습니다. 오늘은 80년대 프랑스의 여름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영화 <녹색 광선>을 소개합니다.
<녹색 광선(1986)>의 감독 에릭 로메르를 처음 접한 건 인스타그램 피드였어요. 무심하게 피드를 내리던 중,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이규태님의 그림이 제 손가락을 붙잡았습니다. 에릭 로메르의 각본집에 삽입된 그림들이었지요. '에릭 로메르'라는 왠지 몽상가적인 이름부터, '각본집'이라는 장르, 그리고 <비행사의 아내>, <녹색 광선>, <만월의 밤> 등 책 속에 담긴 영화의 이름에서 흘러나오는 정서를 정확히 형용해 낸 그림이었습니다. 그 이미지에 너무나 매료되었는데, 그 후에도 독립 책방에서 종종 이 각본집을 만나서 에릭 로메르 감독, 그리고 이름이 유난히 반짝이는 영화 <녹색 광선>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할 만한 영화는 완벽한 기분일 때 보고 싶어서 괜히 아껴 두는 버릇이 있습니다. 뿌듯하고도 피곤한 하루를 보낸 금요일 밤, 주말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꺼내 보았어요. 주인공 델핀은 함께 휴가를 계획한 친구가 파투를 내자 혼자 여름을 보내게 됩니다. 여름 휴가를 잘 보내고는 싶지만, 그렇다고 혼자 다니긴 싫어 고민하던 와중 친구네 집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인 자신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편해 떠나죠. 이성을 사귀고는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아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번번이 실패하고,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들은 델핀과 어딘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날, 역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는 왠지 통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과연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델핀의 소원은 이루어질까요?
사실 이 영화는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일상적이고 자연스럽습니다. 대화하거나 다투는 장면에서도 배우들의 연기를 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진짜 친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죠. 그래서인지 '녹색 광선'(해가 수평선을 넘어갈 때 보이는 초록 빛)이라는 제목에서 기대하게 되는 신비감과는 사뭇 달라서 처음 영화를 다 보았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자, 필름으로 만든 영화 특유의 서정적인 노스탤지어와 프랑스 영화스러운 컬러풀한 색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때 알았죠.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주제나 서사보다 이미지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더 매력적이고, 오랜 여운이 남는다는 것을. 저는 앞으로 편안한 저녁을 보내고 싶을 때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하나씩 꺼내 보게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