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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May 20. 2018

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아서

레이디 버드가 크리스틴으로 돌아갔듯이 나도 내 이름으로 돌아갔다

  나는 부산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바다가 훤히 펼쳐 보이는 항구 도시이지만, 그 바다는 나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듯했다. 시원하게 철썩이는 파도가 후련 동시에, 때때로 '여긴 육지의 끝이야. 여기서 더 떨어져서는 안 돼'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부산을 벗어나고자 열심히 노력했고, 운이 좋아 대학 입학에 때맞춰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를 했다.


  서울로 떠나기 며칠 전, 나는 부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살던 동네를 다시 걸어보고, 기억을 되짚어보고, 마지막으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실은 부산이 가지고 있는 함의가 싫었던 것이지, 내가 살던 동네는 정말 사랑했었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 많이 아쉬웠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터전을 옮기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의 동네가 유난히 아름답게 보인다는 걸. 레이디 버드가 뉴욕으로 떠나기 직전에 지루하기만 한 줄 알았던 새크라멘토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처럼.


  사실은 나도 내가 지은 이름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중학교 2학년 시절, 갖고 싶은 이름을 지어서 옆에 앉은 짝과 서로 불렀더랬다. 당시 난 내 이름이 그렇게 심심하고 미웠다. 2년에 한두 번씩은 같은 반에 있는 '소정'이를 만나며 내 이름 참 흔하다, 싶었다. 게다가 '문'씨라니. 너무 남자 같잖아. 어떤 이름이랑 붙여도 이상한 성씨라고 생각했다. 내 이름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나의 또 다른 이름을 '임현경'으로 지었다. '현경'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나왔는지 잘 기억이 안 나고, 그때 내가 참 좋아했던 소녀시대 윤아의 성(性)인 임씨가 너무 예쁜 바람에 그 성을 빌려 썼더랬다. 한동안은 '임현경'이라는 이름을 교과서 한구석에 소심하게 써놓고, 각자가 지은 이름을 가진 친구끼리는 그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주곤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만 부르는 이름이었으니 우린 서로가 가명을 갖고 있다는 것도 곧잘 까먹었고, 아무리 그 이름으로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 친구 때문에 금방 그만뒀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보단 내가 나에게 지어준 이름으로 불리우고 싶었다

  그땐 왜 새로운 이름을 나에게 지어주었을까? 아마도 중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 별로였던 것 같다. 나로부터가 아니라 바깥에서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임현경'이라는 이름을 쓰면 좀 더 나은 내가 될 줄 알았던 거지. 더 예쁘고, 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실은 내겐 지금도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지은 그 이름이 아니라 엄마가 절에 가서 받아온 이름, '문지유'. 뜻은 기억이 안 나지만 뭐, 좋은 뜻일 거다. 이젠 좋은 의미로 새로 지어준 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이 영 어색하고 나답지 않다.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고집하다가 스무 살이 되고 다시 크리스틴이 되기로 한 그녀처럼, 나도 일종의 변화를 겪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한다. 문소정의 '소'는 내향적인 나를 드러내는 것만 같다. 자극에 예민하고, 휴식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 그 글자에 '정'이 붙어 '소정'이 되면 왠지 따뜻한 느낌을 준다. 내가 좋아하는 내 사람들을 챙기고 보살피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달까. 그리고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성씨 '문'은 어딘가 당찬 투사 같은 느낌이다. 꽤나 진취적이고 가끔은 겁 없이 뛰어드는 나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하다. 또 살아오면서 꽤 많은 '소정'을 만났지만 '문소정'을 만나보진 못했다. 그래서 내 이름이 주는 그 느낌을 참 좋아한다. 적당히 평범하면서도 적당히 개성 있.


  이름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내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부모님이 지어주는 것이고, 누군가가 나를 부르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에 불과하지만, 사람은 그 이름과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 영화 속 레이디 버드가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다시 선택한 것은, 기대와 달리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뉴욕에 가도 멋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것처럼, 그리고 내가 '임현경'이라는 이름을 묻어두고 '문소정'이 되기를 선택한 것처럼, 내 밖에 있는 것으로 나를 채울 수는 없다는 깨달음에서 온 것은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는 한참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어차피 다른 이름을 택하고 다른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다 해도 그 모자람이 메워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거든. 결국, 나의 모자람은 내 안 그리고 내 주변에서 채우는 수밖에 없다는 걸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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