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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Jan 16. 2018

<패터슨>: 대단치 않은 일상을 노래하는 시인, 패터슨

감독: 짐 자무시 / 출연: 아담 드라이버, 골쉬프테 파라하니, 카라 헤이워드, 나가세 마사토시
상영시간: 118분 / 개봉일: 2017년 12월 21일 / 수입, 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 등급: 12세 관람가

"가끔은 빈 노트가 많은 가능성을 주죠. Sometimes an empty page presents most possibilities." 새로 산 빈 노트를 열고 마주할 땐 묘하게 설렌다. 이 노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무슨 감정이 피어오를지 궁금하고, 두근거림과 함께 그 속을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한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 시(市)의 운전기사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노트 속에 자신의 일상을 소박하게 담아내는 시인이다. 그는 생활 속에서 예술을 실천하는 또 다른 예술가,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의 일상은 단순하다. 출근하는 평일 아침엔 6시 15분쯤 일어나 씻고, 시리얼로 간단하게 식사를 때우고 집을 나선다.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곳에서 출발하고, 같은 길을 운전한다. 퇴근하면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차린 저녁을 먹고, 밤에는 강아지 마빈과 산책을 하다가 근처 바에서 맥주를 한잔한 뒤 잠을 잔다. 일견 단순하고 지루해 보이는 그의 삶 곳곳에는 시가 들어서 있다. 그의 집 지하실에서, 운전을 시작하기 전에, 버스를 모는 도중에, 점심을 먹으면서 종종 시상을 떠올리고 머릿속으로 그리고 노트 위에 써 내려 간다. 시장에서 로라의 컵케이크가 잘 팔려 단둘이 외식을 하고 영화를 보러 간 토요일 밤에 그에게 작지만 큰 사건이 연달아 생기고, 우연히 패터슨 시를 여행 중인 일본인(나가세 마사토시)을 만나 새로이 다음 날을 시작한다.


패터슨과 로라는 이질적이면서도 서로 닮아 있는 예술가 부부다. 패터슨은 운전하면서 잠긴 이런저런 생각을 시로 옮기고, 로라는 그녀의 시그니처 패턴을 집안 곳곳에 담아낸다. 로라의 기하학적인 흑백 무늬는 패터슨이 주로 입는 단색이나 체크무늬 셔츠와는 전혀 이질적이다. 로라는 패터슨에게 그의 시가 들어있는 비밀 노트를 세상에 보여주자고 설득하지만, 패터슨은 약속하고도 끝까지 미루다가 결국 그 기회는 날아가 버리고 만다. 패터슨은 매일의 일상 속에서 시를 쓸 정도로 시에 대한 열정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시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반대로 로라는 꿈이 크고 야망이 넘치는 타입이다. 그녀의 컵케이크를 팔러 주말에 시장을 나가기로 결정하고 대박날 꿈에 부풀고, 그녀의 오랜 꿈이었던 컨트리 가수가 되기 위해 비싼 기타도 턱턱 주문한다. 비록 그 꿈이 조금은 허황할 지라도 그녀의 야심은 그녀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직업이 예술가인 것은 아니어도 생활 속에서 예술을 실천한다는 점은 같다. 패터슨과 로라는 장르도, 결도, 실현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결국 같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기 때문에 함께 깊은 감정을 나눌 수 있다.


패터슨의 이름은 패터슨 시(市)에만 눌어붙어 있을 것이라는 예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마을을 누비고 사람들을 나르는 버스 기사라는 점도 그의 이름과 묘하게 어울린다. 영화에서는 패터슨 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패터슨과 로라가 사랑하는 시인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William Carlos Williams 다. 짧지만 강렬한 시로 이름을 알린 시인인 윌리엄스는 패터슨이 유독 좋아하고 따르는 시인인데, 그는 패터슨 시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일상을 관찰한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처럼 패터슨도 일상에서 마주친 물건과 감정을 시에 담는다. 자신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와이퍼를 보고는 차창에 붙은 비에 대한 시상을,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시(詩)에 대한 시상을 떠올리고 노트에 빼곡히 적는다. 특히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시 「Love Poem」은 담배와 성냥이 맞닿는 강렬한 순간을 아내 로라에 대한 사랑으로 비유한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로 시구를 들으면 로라에 대한 패터슨의 사랑을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일상의 물건을 대하는 태도도 엿볼 수 있다. 패터슨은 그의 생활 속 특이하고 대단한 사건은 지나쳐도, 별것 아니고 지루해 보이는 작은 일상은 넘기지 않고 예술로 변화시킨다.


짐 자무시 감독은 마치 영화 같은 이야기를 다룸에도 오히려 뭉뚱그리지 않고 뚜렷하게 연출해내는 재주가 있다. 인물들과 그들이 사는 세상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명확하고 뚜렷해서 마치 그 인물들이 어딘가에 실존할 것 같은 느낌이다. 흔들리지 않고 묵직하게 담아내는 카메라의 덕택이다. 그 덕에 아담 드라이버도 시인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주변의 동네 시인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프란시스 하>에서 자신감 있고 조금은 건방진 힙스터 아담 드라이버를 발견했다면, <패터슨>에서는 짐 자무시의 연출을 만나 고독하면서도 따뜻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속 시는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론 패지트 Ron Padgett 의 시이다.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시를 읊는 아담 드라이버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살아나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패터슨>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일상을 노래한 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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