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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Jun 03. 2018

통영을 마주했다

미지의 공간을 알아가는 여행 첫 날.

  통영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밤새 편안히 못 잤는지 출발하자마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 시간 뒤에 깨어보니 대전 즈음이었다. 헤롱헤롱 거리며 창밖 풍경을 보다가 버스에 달린 모니터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다가 했다. "홍문종 염동열 체포동의안 부결" "트럼프 '김정은, 시진핑 두번째 만나고 바뀌었다'…또 배후론" 조용하고 평온한 산 풍경과 사뭇 다르게 속 시끄러운 뉴스만 나왔다.



  출발한 지 반이 되니 휴게소에 다다랐다. 기사 아저씨는 20분 뒤에 오라고 했다. 먹을 주전부리가 있나, 하고 돌아보았지만, 딱히 당기는 게 없어 편의점에서 빼빼로만 샀다. 햇볕을 받으며 기운을 보충하고선 다시 버스에 들어왔다. 내 뒷자리에 앉은 어르신 넷은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기사 아저씨는 자꾸만 "그냥 가버릴까?"라고 승객에게 물었다. 아무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는지 대답을 피했다. 기사 아저씨는 계속 기다리다가 그 느릿느릿한 어르신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차 근처에 오자 문을 닫고 출발하려는 척을 했다. 남자 어르신 둘은 점심시간인데 밥을 먹어야지, 라고 되레 큰소리를 쳤고 여자 어르신 둘은 할아버지들이 천천히 먹어서 그랬다며 연신 미안하다고 소리쳤다.


백석의 「통영」

  가져온 시집을 꺼냈다. 백석의 등단작이자 '통영'이라는 제목의 시가 들어있는 초판본이었다. 백석의 시는 시골 풍경을 잘게 잘게 묘사하는 것에 능숙한 것이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았다. '시골'하면 흔히 떠올리는 한적하고 고요한 자연 풍경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아이들, 소녀들, 노인들을 그려냈다. 여름날 온갖 동물들을 잡으러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이야기(하답), 무서우리만치 고요하고 시커먼 시골 밤의 이야기(고야), 어린 아내가 첫 아이를 낳은 겨울 아침의 피곤하고도 개운한 풍경(적경).



하답(夏畓)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으 뒷다리를 구어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늪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고야(古夜)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山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늬 山곬작이에서 소를 잡어 먹는 노나리군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걸이며 다닌다

(후략)



적경(寂境)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츰

나어린 안해는 첫아들을 낳었다


인가 멀은 산중에

가치는 배나무에서 짖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금강이야, 금강" "무주 구천동" 내 뒷자리의 남자 어르신 한 분은 자꾸 여기가 어디라며 일행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나이가 들면 한국 지리를 외우게 되는 건가? 내 눈엔 다 똑같은 산과 논밭을 보고 어떻게 지리를 구별해내는 걸까? 그가 잘 모르는 지역을 지나자 그는 안내판을 유심히 읽어내었고 지명을 외우려는 건지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꺼내려는 건지 "산청, 산청"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뒤에 산청 근처엔 무슨 지역이 있는지 자신의 지식을 뽐내었다. 어르신들이 내 뒷자리에서 잠을 방해할 땐 자리를 잘못 잡았다, 후회하였으나 자기들끼리 풍경에 감탄하고 옛 이야기하는 모양이 어쩐지 정겹기도 했다.


  익숙한 은행과 대형 마트가 보였다. 터미널에 도착한다는 신호일 테다. 버스는 큰 주차장에 덜컥 섰다. 서울의 터미널에서 내릴 땐 모두가 준비라도 한 듯이 짐을 싸고 빨리 내리지만, 이곳에선 버스가 멈추고 기사 아저씨가 눈으로 신호를 보내도 별 움직임이 없었다. 나 혼자서만 급히 가방을 정리하고 기사 아저씨에게 수고하셨다며 인사하고 내렸다.


  터미널 한쪽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있는 그가 보였다. 오늘 하루는 남자친구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일주일 만에 재회한 우리는 똑같은 모습이었다. 서울이 아닌 통영이라는 점만 다를 뿐. 생소한 외지에서 그의 익숙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통영시 광도면 죽림리

  버스로 5분 정도 이동해 숙소 근처에 내렸다. 우린 그 동네를 걸으며 내내 감탄했다. 조용한 주택가의 분위기와 깔끔하게 들어선 빌라들, 낮은 키의 나무. 통영에서 푹 쉬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동네였다. 숙소로 향하며 통통한 뒷모습이 귀여운 여자아이를 마주쳤다. 그녀와 같은 방향이라 한참을 뒤따라 걸었다. 조그마한 고사리손에 들린 큰 화면의 삼성 핸드폰이 내 눈엔 어색했지만, 그 아이에겐 필통이나 책가방처럼 너무나 일상적인 물건이리라.


  짐을 풀고 잠깐 휴식을 취하곤 시내로 나갔다.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먹었던 해물짬뽕을 먹으러 갔지만, 몇 분 차이로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 실패했다. 근처에 있는 용문반점으로 가 해물 짜장과 해물 짬뽕을 시켰다. 짜장은 짜파게티처럼 달달한 스타일이었고, 짬뽕은 해물과 기름이 가득하지만 의외로 싱거웠다. 나중에 알아보니 알쓸신잡에 나와 유명해진 분소식당과 용궁뚝배기도 꽤나 싱겁다고 한다. 통영의 특성인걸까? 당황스러울 정도로 싱거운 맛 때문에 해물만 건져 먹었다.


  먹는 내내 식당은 떠들썩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로 싸우는지 재잘대는지 모를 이야기를 나누는 주인네들 덕이었다. 나는 부산 사투리를 쓰는 반서울 반부산 사람임에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어른들인데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쓰는 심한 사투리를 썼다. 억양이 센 탓에 마치 싸우는 것 같지만, 아마 무료한 하루를 투닥거리로 달래는 것이리라. 그리 맛있는 식사는 아니었다만 통영이라는 미지의 지역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봉수골에 있는 누군가의 집. 창문 너머로 나무가 보이는 집에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근대식임에도 깔끔한 외관을 지녔던 로얄장여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미륵산을 오르기로 했다. 푸른 숲과 산을 보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용화사 입구로 향했지만, 깎아지르는 경사를 보고 출발하기도 전에 질려버려 포기했다. 대신 미륵산 입구로 가는 길의 동네가 정겨워 그곳을 걸어 내려갔다. 봉수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동네도 숙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새로 지은 빌라가 아니라 옛날 건물 그대로라는 점. 특히 '로얄장여관'이라는 건물은 근대 일본식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외관을 깨끗하게 유지한 덕에 아름다웠다. 하루쯤 그곳에 묵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로얄장여관.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알고 싶은 곳.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정류장 바로 옆의 식당에서 나온 아이들은 서로 줄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자랑하며 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예쁘고 해맑아 자꾸만 눈이 갔다. 빤히 바라보는 내 눈길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줄넘기에만 집중하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정류장 건너편에는 땋아 내린 꼬랑지가 귀여운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할아버지로 추정되는 어르신은 아이의 보디가드 마냥 멀뚱히 서 있었다. 놀아주는 법은 몰라도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멀리서도 보였다. 아이는 지나가는 언니 오빠들을 쳐다보기도 하고, 버스에서 짐을 들고 내린 할머니와 인사하기도 했다. 그 할머니는 아이가 사랑스러웠는지 장 본 것들을 뒤적이다가 참외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이도, 할아버지도 꾸벅 인사를 했다. 그 사이에 반대편에서 한 끌개를 끄는 할아버지가 걸어와 참외를 준 할머니의 짐을 끌개에 턱 넣고는 걸어갔다. 우리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이같이 맑고 수수한 통영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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