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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Jun 03. 2018

통영, 조선의 나폴리

고요한 통영을 만난 둘째 날

  오늘은 남자친구를 보내고 엄마와 여행하는 날. 나도 통영이 처음인 여행자인데, 어쩌다 보니 우리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한 기분이었다. 터미널에서 만난 엄마는 나를 보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아마 내가 어제 낯선 곳에서 남자친구를 만나고 느꼈던 반가움과 비슷한 감정일 테다. 우린 숙소에 들러 짐을 내려놓고 씻은 뒤 점심을 먹으러 통영항으로 향했다.


통영항은 아니지만, 죽림리의 버스 정류장.

  통영항 쪽 버스 정류장은 조그만 주제에 사람이 꽤 붐빈다. 정류장마다 통영 출신 시인의 사진과 그가 쓴 시를 적어놓았다. 낡고 때 묻은 정류장이 시인의 흑백사진과 꽤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 같은 관광객에게나 눈에 띄지, 이곳을 매일 드나드는 통영인은 시가 쓰인 정류소가 존재하는지도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미세먼지 수치가 꽤 높은 날이었다. 나와 엄마는 비염 탓에 공기에 꽤 민감한 편이다. 그래서 나갈 때 목이나 코가 안 좋을 때를 대비해 마스크를 가지고 나갔는데, 준비가 무색하리만치 아무도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 지금 서울에선 안개로 착각할 만큼 먼지가 자욱하게 깔려 있을텐데, 통영에선 마치 낡은 차창 너머로 맑은 하늘을 보는 듯했다. 공기의 변화를 몸으로 금세 알아채는 엄마조차 먼지를 못 느끼겠다고 했다. 나는 가져온 마스크를 3박 4일 동안 하루도 쓰지 않았다.


  점심엔 시원한 생선회를 먹기로 했다. 우리가 검색했던 식당은 횟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길의 첫 집이었는데, 바로 들어가긴 왠지 아쉬우니 다른 식당도 둘러보며 분위기를 살피기로 했다. 그런데 연휴가 지나서인지, 다들 손님이 없었고 그저 그랬다. 우리보다 앞서가던 여자 둘도 횟집을 둘러보다가 유턴하여 첫 집에 들어갔고, 그들이 유턴한 지점에서 우리도 똑같이 뒤돌아 첫 집에 들어갔다.


서비스로 나온 음식이지만, 내 인생 매운탕이 되었다.

  다행히 그 집엔 손님들이 꽤나 있었다. 우린 물회와 회덮밥을 시켰다. 먼저 서비스로 매운탕이 나왔고, 그다음에 메인 메뉴가 나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물회는 양념이 너무 달았고, 회덮밥은 참기름을 까먹었는지 특유의 감칠맛이 부족했다. 오히려 매운탕이 맑고도 진한 맛이었다. 생선 살도 통통하게 오른 것이 발라먹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그제야 다른 남자 손님들이 매운탕을 시킨 것을 알아채고 후회했다. 그땐 몰랐다. 그 집 매운탕은 내가 통영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는 한 끼였음을.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해가 쨍쨍 내리쬈다. 아직 습하 않아 기분 나쁠 정도는 아니었지만 밖을 나다니기엔 힘들었다. 엄마는 카페에 가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했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어제 다녀온 봉수골을 다시 가기로 결정했다. 같은 길을 예습한 덕에 능숙하게 길을 안내하고, 내가 좋았던 곳들을 소개했다. 어제는 길을 잘 알아보지 않고 되는대로 가는 바람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체력적으로 꽤나 힘들었지만, 오늘은 방향을 알고 도보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도 알고 있으니 모든 게 정말 수월했다. 뭐든지 처음이 힘들고 어려운 법이지.


  가는 길에 구시가지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제도 같은 장소에서 본 얼굴들이었다. 지방선거가 삼 주쯤 남아 보수당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노래를 시끄럽게 틀고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그들이 궁금해졌다. 가끔 내 가치관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만나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진다. 행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자꾸만 묻고 싶어진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공대생을 만났을 때, 자신을 폴리아모리라고 소개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러했듯이.


봄날의 책방. 벽에는 통영의 시인과 작가가 그려져 있다.

  우리는 카페에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다가 근처 책방엘 갔다. 봄날의 책방이라는 곳이었다. 책방 앞에 다다르자 옆집의 개가 갑자기 왈왈 짖어댔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렇게 짖어대며 위협하려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지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까지도 신경 쓰면 피곤할 텐데. 스트레스 받지 않게 해주려고 책방에서 나올 땐 일부러 멀리서 걸었건만, 예민한 그 아이는 변함없이 왈왈 짖었다.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던 책방.

  책방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여러 종류의 책이 꽂혀있었다. 방 한 켠엔 통영에서 나고 자란 작가들의 방이 있었다. 한 권 사고 싶었으나, 여행자에겐 부담스러운 두께여서 눈으로만 담아두었다. 나는 백석, 박경리 등 통영의 예술가들이 그려낸 통영을 떠올려 보았다. 서울의 장점이자 단점은 온갖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탓에 '서울다움'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나는 아무 색도, 향기도 느끼지 못한다. 아마 그 말엔 각자 다른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은 전통과 테크놀로지의 혼합을 떠올릴 것이고, 시골 사람들은 시끄러운 홍대나 강남을 떠올릴 테다. 서울에서 꽤 오래 살아온 나는 종로와 우리 동네가 떠오른다. 땅이 너무 넓고,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나머지 정말 '서울다운' 공간이나 사람은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도 서울의 매력일 수 있겠지만, 그 방에서 통영다운 책을 읽으며 한 지역의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글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실감했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漁港)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화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 주변에는 무스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하고 있다.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 다름이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벼랑가에 얼마쯤 포전(浦田)이 있고 언덕배기에 대부분의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아 지세는 빈약하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중





  책방에서 나와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라고 했다. 산을 위에서 내려다보자 마치 새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맨 꼭대기의 나뭇잎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저 멀리 있는 섬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참 푸르렀다. 황톳빛 토양을 감싸는 초록색 잎들, 파르스름하다가 갈수록 탁한 남색빛으로 변하는 바다. 그 날의 통영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강인한 청년의 기상처럼 푸르렀다.



  통영은 '항구도시'나 '다도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미륵산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다 보면, 사방에 푸르른 섬과 언덕이 가득하다. 크고 작은 섬들이 서로 넉넉한 거리를 두어 위치하고, 그 사이는 바다가 가득 메웠다. 부산의 바다는 그 끝이 보이질 않아 어쩌면 망망대해로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고, 대구의 분지는 사방에서 나를 조이는 듯하다. 통영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무엇도 더 바라지 않고 가만히 시간을 기다리는 섬. 산등성이가 높이 깎아지르지도, 파도가 맹렬하게 치지도 않는 고요한 도시. 오늘, 나는 또 다른 통영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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