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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문아 Nov 03. 2022

우는 나는 죄가 없다.

정말로.

 최근에 남자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다. 감정을 마구 쏟아내며 화를 내는 걸 잘하지 못하는 나는, 어느 순간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남자친구도 기분이  상했는지 침묵을 지켰다. 시계가 멈춰버린 것 같은 억겁의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사람 많은 식당에서 그러고 있었던 탓에 난 주변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어머어머, 저 사람들 싸웠나 봐."

쑥덕이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실제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순식간에 눈물이 부욱- 하고 차올랐다. 러움에 목까지 메었다. 바람이 옆에서 툭- 건들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애기마냥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 수 있을 것 같은 설움이었다. 울해. 억울하다. 억울해 죽겠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앞에서 울면 그 사람의 저의를 의심하게 된다'는 남자친구의 말이 환청처럼 귀에 웅웅 울렸다.



내 저의를 의심받고 싶지 않았다. '지가 잘못해놓고 눈물로 호소하려는 애'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안구 주변을 꾹꾹 누르며 눈물을 있는 대로 뱃속으로 빨아들였다. 음식을 급하게 먹어 기침이 나오는 척 괜히 큼큼거리고, 눈에 눈곱이 낀 척 수차례 눈을 비벼 눈치 없이 주변으로 삐져나온 눈물을 황급히 지워냈다. 하지만 억울함은 가시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왜, 대체 왜 울면 안 되는가?





세상은 웃음에 관대하다. 아, 물론 엄마나 직장상사한테 혼날 때는 예외다. 그런 상황에서 피식거리면 '이게 웃겨?'라는 욕 아닌 욕이 날아들어올 수 있으니. 하지만 그런 때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은 웃음에 관대하다.



면접을 볼 때나 손님 응대를 할 때, 리는 늘 미소를 머금는다.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도쟁이로 보이지 않는 이상 웃으면서 대꾸를 해준다. 길거리나 대중교통에서 친구와 전화를 하며 이따금 하하, 웃는 사람은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지만, 손까지 바들바들 떨면서 고개를 떨구고 우는 사람은 모두가 아닌 척 힐끔거리며 시선을 둔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도 웃음은 자연스럽다. 팀장님이 어떤 아재 개그를 해도, 혹은 뼈가 있는 아픈 농담을 해도 웃음으로 무마하면 대충 넘어가진다. 회의시간에는 주고받는 말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대충 웃음으로 때우다 보면 회의가 끝나 있곤 했다.



 그런데 울면 안 된다. 우는 순간 우리 회사는 그다음 날부터 '이상한 애가 있대.'하고 소문이 나버리고 말 것이다. 팀장이 농담 좀 했다고 갑자기 눈물을 보이더래- 걔랑은 일 못하겠다- 난 순식간에 바보 같은 직원으로 낙인찍힐 것이 뻔했다.



그러고 보니 산타할아버지도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주 신대-라고 했지. 아, 정말 억울하다.



도대체 우는 게 뭐 어때서?





부끄러운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난 주기적으로 울어야 하는 사람이다. 스트레스가 몸에 차곡차곡 쌓여서 사지가 경직되는 순간이 오면, 나 혼자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자취방으로 후다닥 몸을 숨기고 훌쩍거려야 한다. 쭈글쭈글 일렁거리는 벽지가 발라진 벽에 찰싹 달라붙어 슬픈 영상은 있는 대로 다 섭렵하고, 그 영상 길이만큼의 눈물을 줄줄 흘려줘야 마음이 시원해진다.



울지 않고 캔디처럼 씩씩하게 살아올 때, 나는 병이 났다. 마음의 병이 나서 헐레벌떡 병원을 찾아 약을 꾸역꾸역 삼켰다. 정신과 병원에서 알약만 꿀떡꿀떡 넘길 때는 잠만 쏟아지고 나아지지 않던 병이,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말과 눈물을 함께 쏟아내는 순간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막혀있던 수도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듯 화-한 시원함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그 경험 때문인지 난 어느샌가부터 주기적으로 우는 것의 치료효과를 맹신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만병통치약 이라며 깡생수를 들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종교인 같지만, 적어도 내 눈물의 효능이 그 깡생수보다는 나은 것 같긴 하다.



그래서 가끔은, 모두가 모여 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 요즘이 슬프다. 충분히 슬퍼해야 할 상황이 눈앞에 닥쳐도 모두가 우는 것을 멋쩍어한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당장이라도 거대한 괴물이 잡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정말로 산타할아버지가 우는 사람만 빼고 선물을 주기라도 할 것처럼, 울어야 될 상황에도 사람들은 눈물을 꾹 누른다. 남자친구와 싸운 식당에서 죄 없는 안구만 눌러대던 내 손가락처럼 군다. 다들 엄지손가락처럼 군다.



그냥 엉엉 울면 될 것을, 또 그 감정을 비슷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환한다. 이성적인 척, 차분한 척하다가, 옆에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건들면 억눌린 답답함을 분노로 치환한다. 네가 뭔데-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발톱을 세우고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바쁘다. 울면 지는 것, 울면 약해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해 더 울지 못하고 바락바락 소리만 질러댄다.



인터넷에서 그런 일화를 본 적이 있다.

버스에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젊은 20대 남성에게, 50대 즈음의 남성이 시비를 걸어 싸우게 되었는데, 갑자기 20대 남성이 훌쩍거리자 50대 남성이 '너 왜 우냐, 많이 힘드냐?' 하고 위로를 해주었다는 얘기. 그 뒤로 그 둘은 싸우지 않고 도란도란 위로를 나누었다는 얘기.



눈물을 그런 힘이 있다. 내가 꿀덕꿀덕 삼키던 신경안정제나 바락바락 질러대는 사람들의 분노와 다르게, 눈물은 나와 모두를 함께 치유하는 힘이 있다. 흘리는 순간, 불행 바이러스가 그 눈물 줄기를 타고 밖으로 튀어나가 버리듯 마음이 가벼워진다. 웃음은 전염된다는 말이 있듯 눈물도 전염된다. 꼭 부정적인 것이 전염된다는 뜻 같아 꺼리는 자가 많다는  안다. 하지만 전염병과는 다르게 눈물은 모두에게 백신 같은 존재다. 모두가 함께 나누어 울고 나면 그 답답함이 조금은 가신다.


내가 '죽음은 무엇일까'에 대한 내 생각을 중언부언 얘기하다가 회사동기들 앞에서 덜컥 울어버렸을 때도, 그들은 내 눈물을 관망했지만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시원했다. 그저 그들의 눈빛이 한없이 따뜻해서 더 서럽지가 않았었다.



그러니까 모두, 슬프면 잠시 울자.

가급적이면 혼자 방에서 울지 말고, 마음 나눌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울자.


이성적인 척, 깨어있는 척, 소신 있는 척 인터넷에서 엄지손가락을 놀리는 그 억눌려있는 눈물들을 뒤로하고, 오늘은 울자. 충분히 슬퍼하자.


눈물은 죄가 없다.

우는 나는 더더욱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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