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생명은 뭐다?
라면의 생명은 뭐다? 간이 적절하게 밴 국물? 꼬들꼬들한 면발? 콕 집어 말하긴 어렵다. 국물의 간이 맞아야 면에도 간이 배니 국물 맛, 중요하다. 그러나 쫄깃하게 씹히는 면발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렇다. 둘 중 어느 것도 양보할 수 없다!
그리하여 라면을 끓일 때면 신경을 좀 (많이) 쓰는 편이다. 남편과 나는 둘이서 라면 세 개를 먹는다. 면 세 개에 스프는 두 개만 넣는다. 정확히는 라면 패키지에 든 면 두 개에 별도의 라면사리 하나를 추가한다. 그러므로 포장지에 적힌 조리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물은 분량보다 200ml 정도 더. 물이 끓으면 스프 두 개와 라면사리를 제외한 면 두 개를 먼저 넣는다. 면을 넣자마자 타이머를 가동한다. 조리법에 적힌 시간 그대로. 이건 면발과의 약속이다.
이제 센불에서 뚜껑을 열고 끓인다. 그래야 수분이 증발하는 동안 간이 적절하게 맞아 들어간다. 그러다가 타이머의 시간이 2분쯤 남았을 때 라면사리를 추가한다. 그래야 적당한 꼬들면이 된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오뚜기 라면사리는 2분, 농심 라면사리는 2분 15초 정도다. 타이머가 울리면 라면 냄비를 바로 인덕션에서 내린다. 그대로 두면 인덕션의 잔열 때문에 면발이 계속 익으니까 꼬들꼬들한 면발을 먹기 위해선 재빨리 그릇에 옮겨담아야 한다. 나는 착착착, 지체없이 이 작업을 해낸다. 그날도 그랬다. 그랬는데……!
젓가락을 들려는 순간에 남편 핸드폰이 울렸다. 하필이면 먹으려는 그때!
'금방 끊겠지.'
처음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간단히 끊을 전화가 아니었다. 중요한 업무 관련 전화였다. 통화는 길게 이어졌다. 이건 단순한 통화가 아니었다. 라면의 사형 선고였다.
내 속은 화장실 급한 사람처럼 안절부절했다. 라면이 불고 있었다. 줄어드는 라면 국물이 확연히 보였다. 한 0.5cm 정도? 속이 타들어갔다. 타들어가다 못 해 붉그락푸르락했다. 나에게 식탐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어찌할 수가 없다. 하아,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십분쯤 지나고 나서야 남편이 전화를 끊었다. 아, 그래도 이 정도면 먹을만하겠다 싶었는데! 전화를 끊은 남편은 문자로 뭔가를 전달해야했다. 그 사이 라면 국물은 0.5cm 정도 더 줄어든 듯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이여, 디여.
어디선가 곡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걸 어찌 살리나. 불어터진 면도 면이지만, 국물도 식어버렸다. 이제 방법은 한 가지였다. 저들끼리 똘똘 뭉친 면을 풀어헤치려면 뜨거운 물이 필요했다. 국물의 간은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용히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그때 볼 일을 다 마친 남편이 “미안합니다!” 하며 곁에 다가왔다. 애써 감추려했지만 남편은 내 표정을 보았다.
“아, 맘 상했군요!”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니었다)
“맘이 많이 상했군요. 그 떫은 표정 오랜만에 보네요.”
앗, 들켰군. 떫은 표정이란 얘길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순간에도 내 속이 노기등등 했으니까. 맹세코 남편에게 화난 건 아니었다. 그저 갓 끓인 쫄깃한 라면을 맛볼 즐거움을 날려서 맘이 아플 뿐.
이제 라면 국물은 완전히 졸아들어있었다. 끓는 물을 부어서 면을 휘휘 저으니 곧 끊어질 듯 힘없는 면발이 느껴졌다. 국물은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하지만 면은 아니었다. 그냥 숟가락으로 뚝뚝 떠서 먹어도 될 정도였다. 이런 내 맘을 모르는 남편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불은 라면도 괜찮은데요?”
난 동의할 수 없었다. 절대.
라면의 생명은 뭐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 라면의 생명은 꼬들꼬들한 면발이다. 국물이야 여분의 스프를 풀어서 회생시킬 수 있지만, 한 번 불어터진 면발은 소생이 불가하니까. 그러니 세상 모든 중요한 전화여, 라면을 끓일 때는 울리지 말지어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