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의외로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 수긍한다.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넌 내 여자니까!” 20년이 훨씬 넘은 드라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머리에 깊숙하게 남아 있는 명품 대사다. 심지어 이 드라마를 보지 않은 세대인데도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여성을 사로잡는 그 한마디, 최민수가 하면 멋있지만, 일반 남성이 하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는 코멘트. 그래도 여성이라면 언젠가 한 번은 남성에게서 꼭 듣고 싶은 한 마디, 그래서 그 말 한마디로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그저 남성의 품에 의지할 수밖에 만드는 무장해제 필살기 코멘트.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라는 대사만 기억하지 저 대사가 나오기까지 과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태수(최민수)의 결정적 대사 이전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태수는 정권의 비호 아래 혜린의 카지노를 접수하고, 혜린의 회사는 풍비박산이 된다. 이때 태수가 혜린의 카지노에 등장한다. 망연자실해 있던 혜린은 태수에게..)
혜린(고현정): 그럴 수도 있었겠다. 억울하고 분해서…… 아버지를 죽음에 몰아넣었다.
태수(최민수): 당신 아버지에게 화난 적이 없어. 억울하고 분해서가 아니야. 복수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혜린(고현정):???
태수(최민수): “널 갖기 위해서였어.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넌 내 여자니까!!”
대사만을 놓고 보면 너무나 아름답고, 누구나 설레는 말인데, 그 말이 나오기까지 진행 상황
을 보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나와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집안을 파
멸 시키다니? 파멸도 모자라서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게 하다니?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여자
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없앤 다음에 “넌 내 여자니까 널 갖기 위해서였어!”라고 한다면 어느 여
성이 “아 너무 좋아요. 태수 씨너 무 멋있어요.”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게 먹혔다. 먹히는 정도가 아니라 연애 작업 코멘트의 교과서가 됐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명품 대사가 됐다. 그냥 들으면 참 멋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하면서 귀싸대기 얻어맞지 않은 게참 다행인 소리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평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까? 이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뭐 생각할 것도 없다고, 누가 저런 상황에서 사랑에 빠질 수 있겠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우리가 그렇게 이성적이고 정확한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섣부르게 인정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에 이어지는 그 어떤 이유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관대한 본능이 있다. 한 마디로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다음엔 무엇이 됐든 뭔가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서둘러 추측해 버리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이 “왜냐하면~”이라고 말을 함과 동시에 나의 머리에는 ‘머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군’이라고 동시에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왜냐하면’을 들었기 때문에.
심리학자 엘렌 랭어(Ellen Langer, 1947~)의 유명한 실험이다. 복사기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간쯤에 가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다가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1) 죄송합니다만, 제가 5장을 복사해야 하는데 먼저 복사기를 사용하면 안 될까요?
2)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5장을 복사해야 하는데 먼저 복사기를 사용하면 안 될까요? 왜냐하면 제가 지금 엄청 바쁜 일이 있거든요.
첫 번째의 양보 율은 60%, 두 번째는 94%. 한 번 더 실험을 해봤다.
3)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5장을 복사해야 하는데 먼저 복사기를 사용하면 안 될까요? 왜냐하면 제가 꼭 복사를 해야 하거든요.
양보 율은 93%. 말도 안 되는 이유인데도 양보를 이끌어 낸 것을 보면 ‘왜냐하면’이라는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 랭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형식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내용에는 주목하지 않는 것이고 내용보다는 형식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너무도 깊이 뿌리 박혀 있다.”[i]
이러고 보니 앞에 언급한 대사가 이해가 간다. 그리고 그 대사에 열광하는 우리 스스로도 이해가 간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집안이 망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찌 되든 상관없다. 우리 집안을 그렇게까지 몰고 간 장본인이 내 눈 앞에서 “(왜냐하면) 널 사랑하니까,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라고 단호하게 말하는데 어찌하겠나.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상관없다. 이렇게 단호한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있는데.. 그냥 그 사랑을 허락해야지. 현실성이 없는 드라마는 이렇다 쳐도 이런 대사에 열광하는 우리는 또 뭔가? 개인적으로 자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본능과도 같으니까.
장강명의 장편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는 한국이 싫은 수많은 이유가 나온다. 그래서 주인공은 하루라도 빨리 이 버거운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다. 따라서 수많은 ‘왜냐하면’이 나온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한국이 싫어지고 얼른 떠나야 할 것 같은 욕망이 차오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그렇게 고생하며 회사에 다니는 것도 예순부터 여든까지 좀 편히 살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런데 사실 은퇴를 늦게 하면 늦게 할수록 돈이 더 들어.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몸이 이곳저곳 고장 나니까. 병원도 가야 하고 물리치료도 받아야 하고, 은퇴를 앞당기면 그런 자유로운 생활을 건강한 상태에서 할 수 있어.’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고 듣다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대한민국이 살 곳이 못 된다. 그런데 외국에 간다고 건강할 보장은 없지 않나?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저 말이 그럴듯한 이유는 바로 ‘왜냐하면’에 있다. 우리는 항상 스토리에 목말라 있다. 그래서 새로운 스토리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해지고 무엇이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이 ‘왜냐하면’을 듣고 나면 그다음엔 무엇이든 우리가 좋아하는 스토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동시에 온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구체적인 이유를 듣지 않아도 호기심이 충족된 것 같다. 신경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이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도파민 같은 일종의 쾌락 호르몬까지 방출한다고 한다. 이렇게 ‘왜냐하면’의 힘은 생각보다 굉장하다. 왜냐하면 머리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니까.
엄마와 아이의 대화를 생각해보시길.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와 아이의 대화는 ‘왜?’로부터 시작해 ‘왜냐하면’의 형식이다. 이미 나 스스로 교육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자주 쓰진 말되 효과적으로 사용하길.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도 우리는 고개를 수시로 끄덕이니까.
[i] 독선 사회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p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