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따라 하기'

한은형 '거짓말'

by 문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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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접속’을 아시는가? 1990년대 후반 PC통신을 소재로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영화다. 요즘 같은 스마트 폰 시대에 PC통신이 좀 유치하긴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도 그리고 이별도 참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운명적인 사랑이 주는 애틋함을 보여주면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던 아름다운 영화다.

필자도 역시 감동에 젖어 그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기억뿐이다. 누구랑 봤는지, 그리고 정확히 어떤 줄거리였는지, 주연배우였던 한석규, 전도연의 연기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영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도 무리일 수 있지만. 그런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한 씬(scene)이 있다. 주인공이었던 수현(전도연)이 친구의 애인인 기철(김태우)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무슨 집들이었었나…… 아파트 현관에서 수현이 기철의 구두를 보고선 그 구두에 아무도 모르게 본인의 발을 집어넣고서 흐뭇해하는 장면이었다. 당연히 여자의 발이 남자의 구두에 맞지도 않았고, 엄청나게 큰 신발에 본인의 발을 넣으면서 좋아라 하는 주인공의 표정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오로지 내 머리 속엔 ‘저 신발에 발 넣었다가 무좀이라도 옮는 건 아니야? 냄새도 많이 밸 텐데?’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저걸 남자가 보면 더 싫어할 수도 있는데..’라는 걱정마저 들었다. ‘그런데 저걸 도대체 왜 하는 거지?’

그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서 어느 날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뭔가 힌트를 얻기 시작했다. 아이가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면 부모는 그 모습을 반색을 하며 기뻐한다. 그러면 아이는 또 뭔가 흉내 낼 것을 찾아서 또 다른 것을 보여준다. 그럼 엄마든 아빠든 아이를 더욱 예뻐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뇌에는 ‘거울 뉴런’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자동적으로 따라 하게 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절대자인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부모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유전적인 특징도 있을 수 있겠지만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해서 행동까지, 말투까지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방의 경계를 허물어트리고 호감과 관심을 얻기 위한 따라 하기! 나 의사 소한 습관이나 버릇을 내 앞의 사람이 똑같이 하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또 상대방도 나의 말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 나는 어떤 느낌이 들까? 생각으로는 각각 다른 결론을 낼 수도 있겠지만 결론은 똑같다. 그 사람이 그때부터 다르게 보이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오게 돼있다. 그리고 따라 하는 사람도 보통 이상의 애정 없이는 절대로 상대의 사소한 버릇, 말 습관 등을 간파하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하니 영화 ‘접속’에서 좋아하는 남자의 구두에 자신의 발을 집어넣었던 여자 심리의 궁금증이 아주 시원하게 해결됐다. 여자는 일종의 ‘따라 하기’를 한 셈이다. 좋아하는 남자의 구두. ‘나도 그 구두를 신고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그가 하는 것은 모두 다 나도 따라 하고 싶다.’ ‘그가 하는 것은 모두 다 나도 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그 영화에서 짝사랑하던 남자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게 아쉬웠다. 그럼 영화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스토리에서 애틋함과 아쉬움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공감을 하고, 영화가 히트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학연과 지연이 끈끈하다. 이것 역시 서로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강한 연대감이 형성된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따라 하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철벽 같은 남성(여성)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소한 억양이나, 말투, 습관, 행동 등을 그 사람 앞에서 따라 해보라. 우연인 것처럼. 그리고 반복하라. 같은 취미를 공유한다면 더더욱 좋다. 그럼 철벽 같은 성은 조금씩 균열이 가다가 한 순간에 무너진다.

한은형의 소설 ‘거짓말’의 여고생 주인공 하석이는 아주 맹랑하고 성숙한 아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세계 명작들을 두루 섭렵한 책벌레이고 중학교까지는 전교 1등을 한 아이다. 그런데 고등학교의 답답함과 이런저런 일들로 현실에 적을 못하고 방황하던 중 남자아이와 교실에서 알몸으로 잠을 자다 자퇴를 한다. 하지만 더 답답한 규칙의 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다. 또 자살 방법을 수집하는 ‘자살 수집가’이기도 하다. 이런 캐릭터의 아이가 또래 친구와 친해지기 쉽지 없다. 늘 말수도 없고, 뭔가 도도한 느낌을 주는 하석이. 그 하석이를 몰래 흠모하는 룸메이트.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룸메이트가 하석이를 차갑게 대하고 이상한 소문을 내면서 하석이를 ‘왕따’시킨다. 물론 하석이는 룸메이트가 자신을 왕따 시키며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석이 가룸 메이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 그래서 나, 기분, 나쁘라고, 나를, 따라, 한, 거야? 내가 너한테 한 것을 흉내 내서 한번 당해보라고? 그런 거야?”

나는 이해력이 떨어지는 룸메이트를 위해서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차근차근 말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러면?”

“말하고 싶지 않아.”

나는 룸메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애의 입술이 벌어질까 궁금해하면서. 룸메이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듣고 싶은데?”

나는 다시 말했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어 “그럼 어쩔 수 없지”하고 한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애가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는 계속 궁금했다.

“너처럼 말하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어.”

드디어 나온 룸메이트의 말에, 나는 웃어 버렸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애도 다른 애들처럼 나를 무시하기로 한 게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럴까 봐 내가 얘기 안 한다고 한 거야.”

“미안.”

미안했다. 어쨌든. 이 애는 아직은 나를 무시하지 않고 있으니까.

“또 웃네. 웃지 마. 기분 나빠”

“그래 미안.”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얘는 나를 닮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닮고 싶어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아무리 냉랭한 사람이어도 이런 일이 생기면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중심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으로 퍼지면서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 해진다.

어떠신가?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책들에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간략하고 명쾌하게 방법을 제공하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누군가 나를 닮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순간 몸이 따뜻 해지면서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 해진다.’ 사춘기 소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후배든, 선배든, 어려운 직장 상사이든, 짝사랑의 상대든 상관없다. 자주 볼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상대를 사로잡을 필살기 하나는 제대로 장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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