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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석현 Jun 22. 2017

'합리화'만 하는 인간

'내가 무조건 옳다.'는 어리석은 믿음.

대한민국에서 명절 때 친척들과 있을 때나 친구들끼리 대화할 때, 혹은 부부나 연인 사이라도 절대로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될 주제가 있다. 바로 ‘정치’ 이야기다. 

 워낙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습성도 있고, 일단 내 편 이 아니면 무조건 차단하고 보는 배타성도 큰 몫을 한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부추기는 우리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정치 이야기로 논쟁이 붙었을 때의 대화 내용을 잘 들어보면, 어느 한 사안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누가 혹은 어느 정당이 찬성하고 반대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목소리는 커지고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예를 들면 이렇다.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미사일 방어 기지를 건설한다고 하면, 당연히 미사일 공격 범위와 위력, 그리고 예상 피해 등을 점검하고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기지의 효율성은 과연 적절한지를 따져보면 지지 정당이나 인물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결과야 어떻게 나든 서로의 대립 각은 그래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론상으로야 늘 이렇게 멋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논리와 객관성, 이성을 기초로 해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문제를 항상 감정으로 푼다. 그것도 순간순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감정적 대응으로.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이 있을 수 없다. ‘무조건 내가 옳다. 나는 합리적이니까.’ 이런 굳건한(?) 믿음 때문에 상대를 더 무시하고 나만, 나의 편만 더더욱 옳다고 생각한다. 

 더 쉽게 얘기하자면 이런 거다. “내년부터 대학 등록금을 반으로 줄이자.”는 의제가 나왔다고 치면, 기본적으로 현재 상황에서 등록금을 반으로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있는지, 재원은 어떻게 보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객관적인 여러 여건을 검토한 후에 찬성, 반대 혹은 다른 보완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그 의제를 누가 발의했는지가 중요하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상관없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했으면 무조건 찬성. 그 반대면 무조건 반대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거의 모두가 찬성하는 이런 의제가 누구에게 어울리냐를 묻는다면, 무조건 본인이 지지하는 정당이 나 정치인이 더 그 정책이나 의제에 어울린다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만약 야당 지지자라면, ‘그런 이슈는 여당보다는 야당이 주장해야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여당 지지자는 반대라는 얘기다. 

 주제 자체가 타당한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 심지어는 누가 그런 주장을 했는지도 상관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무조건 싫다. 마음속에 사람을 정하고 나서 정책이나 의제를 그 사람에 갖다 붙이는 셈이 된다. 그리고서는 전혀 찜찜하다거나 ‘이게 정말 맞는 건가’ 하는 식의 의심도 없다. 

 얼굴만 봐도 싫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싫다. 그리고 나에게 잘 해줘도 그것도 싫다. 객관적이 기이 전에 감정이 개입하면서, 즉각적인 무의식이 작동하면서 모든 의식의 활동을 차단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하는 모든 행동이나 언행에는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런 행동은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생활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다만 우리 스스로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하고 판단하는 지를 모를 뿐이고, 그런 행동과 판단, 결정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무조건 옳다고 믿고 있다. 

 정이현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에서 ‘익명의 당신에게’에서는 종합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일하는 연희가 있다. 어느 날 이 병원 항문외과에서 의료진이 아닌 사람이 새벽에 환자의 분문(糞門)을 촬영한 변태 사건이 발생한다. 범행이 새벽에 이뤄졌고, 소독을 빙자한 후 촬영한 것으로 봐서는 내부자의 소행이 틀림없다. 범인은 과연 누굴까? 하지만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인 연희에게는 관심사도 아니다. 특히나 사귄 지 육 개월이 지났는데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않은 남자 친구이자, 안과 수련의인 상현 때문에 더 골치가 아프다. 근래 들어서 연락도, 데이트 횟수도 점점 뜸해져서 더 초조하다. 

 여기서 잠깐, 이 둘은 어떻게 사귀는 사이가 됐을까? 연희가 상현을 선택한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보자. 

 ‘연희 가상현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얼마 뒤면 안과 전문의가 되리라는 세속적 이유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연희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보다 복잡하고 예민한 것이었다.’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상현이 더욱 커 보이고, 호감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 이유를 훌륭히 커버할 수 있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왕가위 영화 좋아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지금껏 연희가 만나온 남자들은 대개 맨송맨송한 표정으로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상현이 보인 반응은 전혀 달랐다. “아무래도 『열혈남아』나 『아비정전』 같은 초기작들이 더 문제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화양연화』 쪽이 끌려, 불륜 서사라는 형식은 불완전한 우리들 인생에 대한 감독의 처연한 은유가 아닐까”상현이 선택하는 어휘들은 단정하고도 명쾌했지만 정작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가 왕가위의 이름을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연희는 충분히 만족했다.’

 누구나 아는 체를 하며 할 수 있는 얘기를 했을 뿐인데, 정작 연희는 상현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왕가위의 이름을 안다.’는것 만으로 연희는 상현의 모든 것을 지지할 준비를 마친다. 하지만 사귄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좋아지기는커녕점점 더 연희의 스트레스만 커지는 상황까지 간다. 밥을 먹으러 갈 때도 의견이 맞지 않았고, 당연히 연인끼리 있어야 할 스킨십도 많이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한 번쯤 냉정하게 둘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지만 연희는 상현의 이런 행동이 더 신사적이라고 믿는다. 

 ‘상현의 스킨십은 어쩐지 본인의 들끓는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 이 사람은 적어도 여자를 고무 인형으로 대하는 플레이 보이는 아니니 안심이야. 우리는 서로를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니까. 연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현은 연희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서서히 관계를 정리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별이 싫은 연희는 결국 상현의 집에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상현의 컴퓨터에서 수많은 여성의 둔부 사진과 한 곳만 집중 촬영한 사진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얼마 전 있었던 ‘변태 촬영 사건’의 범인도 상현임을 알게 된다. 

이제 연희는 서둘러 정신을 차려야 정상이다. 하지만 연희는 궁지에 몰려 도움을 청하는 상현에게 구원자가 된다. 범죄 시각 자신과 같이 있었다는 거짓 진술을 하면서.. 그리고 그녀는 굳게 믿는다. ‘나는 지금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신념은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연희에게 만 존재한다. 

이 소설 은평 범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현실에서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  그리고 깊은 깨달음을 준다. 자기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바라본다는 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자기 자신과 더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으려면? 정답은 알 수 없지만 다른 이의 행동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법이 그래도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래서 항상 타인의 이런저런 이야기로 가득한 책과 늘 함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최소한 성장은 못할 망정 나도 모르게 나를 묶는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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