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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석현 Jul 04. 2017

포기를 못하고 끝까지 가는 심리

매몰 원가(sunk cost)라는 함정에 집착하는 우리들

직장인 5년 차 승구 씨는 ‘몸짱’의 부푼 희망을 안고, 그리고 사실은 자꾸 나오는 아랫배를 어떻게 든 줄이기 위해서 연회비 100만 원의 거금을 내고 고급 호텔 피트니스에 등록을 한다. 시설도 훌륭하고 그리고 회원들 중에는 매력적인 여성들도 많아서 승구 씨는 퇴근 후 운동을 하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영업을 해야 하는 직업 상 사람들과의 잦은 술자리 때문에 매일 들르지는 못해도 초반에 들인 돈이 너무 아까워 이를 악물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꼬박꼬박 운동으로 채웠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잠시, 운동을 열심히 한 후 두 달쯤 지났을 때, 그만 허리를 다치고 만다. 병원에 가니 의사는 당장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고 치료에만 전념하라고 충고한다. 

 승구 씨는 고민한다. ‘그럼 지금이라도 피트니스를 끊어야 하나?’ 약관을 보니 이미 두 달이나 지났기 때문에 연회비의 반의 반도 못 돌려받을 판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허리가 더 아픈 것 같다. 매일매일 아픈 허리를 짚어가며 고민을 하다가 승구 씨는 결심한다. ‘그래 들인 돈이 얼만데…… 그래도 조금씩 참아가면서 살살 하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당장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남의 일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당연히 피트니스를 포기하고 적은 금액이라도 돌려받아야지.’ 하지만 정작 내 일이 되면 자꾸 돈 백만 원이 눈 앞에 아른거리면서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리고는 승구 씨의 결론과 같은 결정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런 일은 살면서 너무나 흔하게 겪을 수 있다. 뮤지컬 티켓을 예매했다고 치자. 10만 원 티켓인데 소셜에 35% 할인된 금액으로 올라온 것을 고민도 하지 않고 냉큼 주문했다. 마침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이어서 그 배우가 출연하는 날짜까지 맞춰서 티켓팅을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뮤지컬 공연 당일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이다. 몸도 아픈데 설상가상으로 공연장까지 가려면 지하철로 한 시간 반이나 가야 한다. 퇴근 시간이니 사람도 엄청나게 많을 텐데. 이렇게 무리를 해서 공연장을 간다면? 아마 뮤지컬을 보기도 전에 졸도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로 몸이 아픈데 그래도 갈까? 가지 말까? 어떡하지? 

 결론은? 대부분 간다. 역시 앞서 승구 씨처럼 이를 악물고 간다.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리고는 위로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마스크를 한 본인의 셀카를 찍어 SNS에 올릴 것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내가 산 티켓이 아니고 누구에게서 받은 것이었다면? 당연히 안 간다. 사람이니까. 아쉬울게 전혀 없다.  

 5년 동안 연애를 해 온 두 사람이 있다. 이제 나이도 있고, 두 사람의 부모님도 서로의 존재를 아니까 결혼할 일만 남겨두고 있고, 두 사람도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유난히 다툼이 잦다. 남자는 여자의 억척스러움 이 부담되고 여성은 남자의 잦은 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처음에는 여성의 생활력과 남성의 친화력 이장 점으로 보이면서 호감이 생겼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 지니까 애초에 내가 원했던 이성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항상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있다. ‘이쯤에서 깔끔하게 헤어질까? ’, ‘솔직하게 속마음을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바로 뒤따르는 고민. ‘지금까지 5년이나 만났는데? 그리고 지금 헤어지면 나는 또 누구를 만나야 하지? 벌써 낼모레면 삼십 중반인데……’

 정길 연의소설 집 우연한 생 중 ‘자서(自序), 끝나지 않은’ 편을 보면, 주인공 ‘나’는 4년째 앓아누워 있는 남편의 병시중을 들고 있고, 그 남편의 세 번째 아내이다. 이 책에서 ‘나’의 남편은 나보다 열세 살이나 많으며, 조폭 출신에 두 번이나 결혼하고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나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남편의 꼬임에 넘어가 결혼을 했고 이 지경까지 왔다. 그리고 각기 배가 다른 다른 여인의 아이 둘, 내가 낳은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첫째 아들의 딸, 그러니까 손녀도 키우고 있다. 

 이쯤 되면, 이건 뭐 고민이고 뭐고 할 것도 없다. 당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계를 끊어야 맞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놀랍다. 그러나 책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스물하나에 처음 만난 남편과 살을 섞고 이듬해 살림을 합친 뒤에야 나는 내가 남편의 세 번째 아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세 번째 여자가 아니라 세 번째 아내. 싫으나 좋으나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어미 노릇을 하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 결합이 어떤 결합이었던가. 절연을 들먹일 정도로 완강했던 친정의 반대를 무릅썼지 않았던가. 거기서 돌아 선다면 너무 빠른 파국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내 분별력이 그릇되었음을 인정하기가 더 끔찍했다. 누구나 자신의 분별력을 오인할 때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처럼 나도 최악의 선택을 했다. 나는 일주일을 고민하고 나서 그 밥상을 받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의 후안무치를 타도하기보다 내 분별력을 지지하고자 오기를 부렸다.’

 과거 에지 불하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게 된 비용을 ‘매몰 원가(sunkcost)’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포기하기엔 아까운 나의 비용과 노력들 때문에 언제나 사람은 비합리적인 판단과 결정을 하고 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쉽게 포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참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그들이 하는 나에 대한 ‘평판’을 몹시 의식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1. 이미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였다. 2. 체면 문제도 있다.  3. 더구나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데 그것도 못했다. 5. 또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다시 좋아질지도 모르잖아? 4. 무엇보다 이런 게 소문이라도 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이런 생각에 빠져들게 되면 그 누구도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는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그래 일단 끝까지 가보자.’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 중에 ‘쓸 데 없는 짓 하지 마라.’가 있다. 그 말인 즉, ‘뭔가를 시작했으면 다른 데 한 눈 팔지 말고 어떤 결과를 얻을 때까지 끝까지 매진하라.’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좋은 뜻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우리는 엉뚱한 데에 접목시켜서 그야말로 엉뚱한 선택과 행동을 하고 있진 않은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아라.’는 뇌에 더더욱 선명하게 박혀서 좀처럼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하니 더 조심해야 한다. 나이 들면 현명해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질 줄 알았는데 사실 은정 반대인 것 같다. 더 시야가 좁아지고, 나의 주장만 옳은 것 같고,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그래서 누가 봐도 비합리적, 비객관적인데 나 혼자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믿고 산다. 

어찌 됐든, 페이스 북이나 인스타그램처럼 소셜 미디어에 죽자고 매달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라. 타인의 시선을 너무나 심각하게 의식하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말처럼 잘 먹히는 말도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해 온 게 얼만데, 아깝지도 않아요? 그리고 여기서 끝내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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