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능적으로 높은 곳에 있어야 안정을 찾는다.
지금부터 한 10만 년 전쯤 네안데르탈인이 활동하던 시대로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갔다고 가정해보자. 몸을 보호할 만한 어느 정도의 옷이나 무기도 있고 또 어느 정도는 생활할 수 있는 음식도 확보돼 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단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은신처를 확보해야 한다. 좋은 은신처의 조건이라면 우선 안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눈에 띄지 않는 곳이어야 하고, 시야가 환하게 확보돼 있으면서 내 등 쪽, 그러니까 뒤쪽이 안전한 곳이라면 아주 좋다. 그래야 자연재해나 맹수, 또는 침입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다 아예 높은 곳에 있어서 외부인의 침입이 어려울뿐더러 한 눈으로도 밖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라면 최상의 은신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나만 이렇게 생각할까? 1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나 지금의 현대인이나 마찬가지 기준으로 은신처를 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니까. 10만 년 전이 아니라 그 전의 원시인들도 똑같은 기준으로 은신처나 집과 같은 장소를 정했을 것이다. 그런 행동들이 수십 수백만 년 동안 내려오면서 우리의 뇌에 각인돼 있다면? 그렇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높은 곳을 좋아한다. 그런 곳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원기마저 회복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신경숙의 장편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는 네 명의 주인공이 끊임없이 걷고 쓰고 읽는 것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걷기’에서는 높은 곳에 올라가 거대한 서울을 바라보는 장면과 높은 곳을 올려 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낙산에서 내가 사는 옥탑방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가 홀로 떨어져 있는 내게 다가왔다. 내 귓가 가까이에서 그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좋아해 정윤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는 옥탑방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불쑥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 윤미루 만큼?
해가 지고 있는 중이라 낙수장이 가리키고 있는 낙산에서 보면 서쪽 동네들이 금빛 잔양에 뒤덮여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그 빛을 받으며 그가 윤미루와 나를 돌아다보고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 해가 지고 있는 이 도시를 내려다보기는 처음이었다.
보슬비 내리는 일요일에 경복궁까지 걸어갔다 온 이후로 며칠 동안 이 옥탑을 내려가지 않았다. 방안에 있거나 답답하면 옥상으로 나가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상징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을 내뿜고 있는 남산타워를 오래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갑작스럽게 사랑고백을 할 정도의 감정 변화 또, 어느 한 사람에 대해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순간 새롭게 떠오르는 것. 또 며칠 동안 외출을 하지 않던 사람이 기분 전환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는 행동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은 분명히 기분전환을 이룰 수 있었고 또 긍정적인 심리 변화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언젠가 후배가 SUV차를 몰다가 세단으로 바꾼 뒤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훨씬 좋은 차로 바꿨는데 왜 불만이 많을까? 궁금했는데 이유는 단하나였다. 예전처럼 앞을 시원하게 볼 수 없어서.
시야가 확보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다. 앞서 원시시대 때를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높은 곳에 있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 조상들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정의 상태가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앞의 시야가 확보가 돼야 앞으로 벌어질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앞을 잘 볼 수 있어야 무언가 다가올 때 알 수 있고, 그것을 알 수 있어야 인간의 보호 욕구가 충족되기 때문이다. [i] 이렇게 생존 본능이나 보호 본능까지도 충족시켜 주는 것이 바로 ‘높은 곳’의 시선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아주 쉽다. 내가 세단 차를 운전하다가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체가 높은 차량이 내 앞에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일단 시야가 가리는 것이 못마땅하고, 머리 위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영 불쾌하다. 그래서 운전하던 차로를 벗어나서 다른 차로로 나도 모르게 변경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습관처럼 오랜 시간 해오던 것을 넘어서 보호 본능을 충족시켜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미생’에서가장 많이 나왔던 장면이 바로 그렇다. 주요 인물들이 갈등이 생길 때마다 회사 건물 정원에서 한 손엔 커피를 들고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던 장면.
그리고 우리가 높은 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돈이나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 대한민국 ‘서열 문화’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서열이 없는 곳이 없다. 직장은 당연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묘한 순서가 있다. 나의 직업상 내가 갑일 수도 있고, 을이 될 때도 있다. 이게 반복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남들보다 위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서열이 밀렸을 때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는 상상을 초월한다. 단군 이래로 가장 풍요로운 시절이라는 대한민국이 삶의 만족도는 전 세계적으로도 하위권에 머물고 있고, 20대들은 내일이 없는 삶을 살고 있고, 노년층은 빈곤이라는 삶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의 원인은 잔인한 서열 문화 때문이라도 해도 문제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어제의 경쟁을 어렵게 뚫고 왔더니 오늘의 경쟁이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다. 이걸 어떻게 넘겨야 하나.. 생각만 하면 한숨만 나오지만 이미 더 어마어마한 경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살다 간 흔적도 없이 타버려서 재만 남을 것 같다. 최소한 나를 위해서, 나를 위로해 줄 하나만큼은 항상 준비해야 한다. 내가 나를 위해 미소를 지으려면.
나이가 많을수록 등산을 좋아한다면 나만의 근거 없는 주장일까? 확실이 나이와 등산과의 상관관계는 있어 보인다. 연세 있는 분들이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인생의 절정기 가지난, 그래서 절정기의 서열보다도 한참 내려간 지금의 모습을 위로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 아닐까? 물리적으로라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심리적인 위로를 받으려는 무의식적 행위가 아닐까. 누구나 서열 경쟁으로 인한 강정 노동에 힘들어한다. 사실 서열 경쟁에서 최종 승자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이런 끝도 없는 갈등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나 스스로를 좋은 곳으로 이끌어 내는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수시로 높은 곳에 올라서 세상을 내려다 보라. 그러면 세로토닌은 확실히 증가한다. 그러면서 나부터 위로하라. 이 방법이 최선이나 최고의 방법이어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에게 자동으로 남아 있는 본능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부터 실천하자. 나를 위해서.
[i] 본능의 경제학. 비키 쿤켈 p135.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