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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바벨 Apr 18. 2019

겁보 탈출기

뉴스에서 봤던 묻지마 범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팔자 좋게 늘어져 '세상 모든 닭을 만나보겠다'라는 생각으로 닭들을 하루에 한 마리씩 불러내던 시기였다. 간혹 호식이나 티바라는 친구의 안부가 궁금할 때면 두 마리를 불러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배속에 닭을 가득 품은 채 잠결에 꾼 어떤 '꿈' 때문에 군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꿈을 꾼 그날 바로 병무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가장 빨리 입대할 수 있는 해병대에 지원을 했다. '붙어라 떨어져라'를 무한 반복하며 널뛰기하던 내 마음을 달랠 방법을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합격 발표 날이 돼서야 상황이란 놈이 '넌 이제 빼박이다'를 외치며 나를 다그쳤고, 나는 7대 1의 경쟁률을 뚫으며 합격했다는 사실로 두려움을 조금은 위안 삼았다. '우리의 주적은 누구인가요?'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당당히 '미국이오!'를 내질렀던 한 친구는 다섯 번의 재시험을 치르고 나서야 영광스러운 내 후임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엄마 나 군대가.”

"언제? 어디로?"

"2달 뒤에, 해병대.”

"정신 나간 놈.”


엄마 몰래 입대 날짜를 받아놓은 정신 나간 나는 결코 무서워서 예비 훈련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와중에 추억을 쌓고 싶어 자전거 여행을 선택했으며,

내 주변을 서성거리던 친구 P에게 '당신을 스카웃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차게 거부하던 P를 향해 "그렇다면 널 납치해가겠다. 그게 안된다면 너의 소중한 물건들을 네가 잠든 시간에 모두 훔쳐 가겠다."라는 천사소녀 네티 식의 협박을 수차례 한 결과, 죄 없는 P는 초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탄 뒤 창고에 방치해둔 자전거를 끌고 나를 따라왔다. 나는 인터넷에서 최저가로 판매하던 자전거를 구매했다.


부모님이 쥐여주신 비상금 15만 원, 핸드폰, 텐트, 지도, 3단 호신봉, 음식과 옷을 챙긴 가방이 있었고, 계획이나 목표는 있지 않았다.


우선 지긋지긋한 은평구를 벗어났고 한강을 따라 안양에 가기로 했다. 선택의 기준은 쉽게 찾아갈 수 있으며 익숙히 들어본 이름이어야 했으니 "병채가 안양과학대 다니지 않아?"라는 질문에 "그래, 그럼 안양 가자."라는 대답은 충분히 정상적이었다 믿는다. 우리는 서울 집에서 드라마 몰아보기에 열중하던 병채에게 전화를 걸어 안양의 정서를 느끼고 오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혔고 "꺼져"라는 진심 어린 응원을 받으며 은평구로부터 꺼지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은평 토박이인 동시에 길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성산대교를 가기로 했는데 가양대교가 나왔다. 반대 방향이었다. 왔던 길을 다시 쭉 달리니 이번에는 양화대교가 나왔다. 성산대교는 가양대교와 양화대교 사이에 있었다. 왜 성산대교를 못 봤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양화대교를 건너 안양에 갈 생각을 못한 것은 쏟아지는 석양이 아름다웠던 까닭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우린 그냥 같이 돌았을 뿐이었다.


오전에 출발한 여행은 어느덧 저녁이 되었는데 나와 P는 집에서 9km 벗어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여행이라기엔 산책을 나온 거리였고, 산책이라기엔 자전거 뒤에 가득 실린 짐이 의아했다. 내 뒤를 따라오는 P의 투덜거림이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저녁 9시가 돼서야 안양 어디쯤에 도착한 나와 P는 텐트 칠 곳을 찾아 방황하다 아무도 없던 학교의 운동장을 선택했다. 운동장 한편에 텐트를 치고 굶주린 허기를 채우기 위해 가방에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꺼내 놓았다. 그래봤자 라면, 참치캔, 즉석 밥 정도였고 한입쯤은 날벌레도 함께 먹었을 테지만 여느 식당에 꿀리지 않을 맛이었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학교 개수대에서 촉감에 의지한 설거지까지 마무리하고 텐트 안에 누워 그날의 대모험을 한참 나불대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분명 정체불명의 소리에 잠을 깼는데 막상 깨고 나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무언가가 우리 텐트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고, 아까 들은 소리였을 거라 여기며 온 신경을 귀에 몰아줘봤지만 소리는 증발했다. 5분, 아니 3분 정도 지났을 무렵 다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또 3분쯤 뒤에 소리가 났다. 나는 새벽에 학교 운동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뉴스에서 봤던 묻지마 범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집에서 걱정하고 있을 엄마의 얼굴과, 남겨 놓고 온 치킨과, 방학 전까지 썸 비슷한 걸 탔던 그 애가 생각났다. 갓 스물 해 넘긴 내 몸으로 무서움이 스물스물 기어오르고 있었다. P를 깨웠고, 한 번 더 소리가 나면 나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퍽." 텐트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한 손만 쭉 뻗으며 얼굴과 몸통을 뒤로 뺀, 그러니까 내 딴에 몸을 최대한 보호할 수 있는 신묘한 자세를 한 채 텐트의 지퍼를 한 손으로 열어젖혔다. 다른 손에는 3단 호신봉이 들려있었다.


지퍼가 열린 텐트 밖으로는, 달리기를 하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보여지고 있었다.


음... 그래... 그랬구나...


나는 이 아저씨가 3분에 한 바퀴씩 운동장을 돌 수 있고,

한 바퀴 돌파를 기념하는 하이파이브의 상대로 우리의 텐트를 선택했으며,

최소 5바퀴는 거뜬히 뛸 수 있는 꽤 괜찮은 체력의 소유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심이 된 나는 아저씨의 체력 증진을 기원해주다 다시 잠이 들었고, 등교하던 학생들의 "저 텐트 뭐야?"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서둘러 학교를 빠져나왔다. 방학이 끝났었거나 방학에도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우리는 수원을 거쳐 천안까지 함께했다.

국도를 따라가다 눈에 띈 과일가게에서 상태 불량의 과일을 얻어먹었고,

굳이 자전거 속도에 맞춰 달리며 클락션 소리를 자랑하던 BMW 차주에게 우리의 된소리 발음들을 자랑했고,

찜질방에서 라면을 사 먹으며 김치 맛에 놀라 네 번이나 김치 리필을 했고,

풍경을 바라보며 달리다 눈시울이 붉어진 탓에 넘어져 고통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리고 천안을 떠나던 날, 힘들어서 더는 못 가겠다는 P의 투덜거림을 조금이라도 줄여보자 싶어 자전거를 바꿔 타자고 제안한 나는 아차 싶었다. 내 자전거와 체감이 달랐다. 분명 짐은 내가 훨씬 더 많이 실려있는데 P의 자전거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P의 투덜거리는 모습이 더는 마냥 웃기지 않았다. 자전거를 바꿔 타자는 나의 제안을 끝내 거절한 P의 손에 서울로 가는 버스표와 호두과자를 쥐여주며 인사를 했다. P는 미안해했지만 나 역시 P에게 지지 않을 만큼 미안했다.


나는 그 이후로 더 열심히 달렸고 P가 없는 탓인지 비슷비슷한 풍경 탓인지 더 이상 눈시울은 붉어지지 않았다. 가다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어느 시골 평상에 드러누워 상상이 가지 않는 군 생활에 대해서도 상상해봤지만 왠지 내 상상과는 많이 다를 것 같았다.


그저 막연히, 앞으로 겪을 수많은 일들이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하는 일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틀을 더 달려 김제에 도착했을 때 내 살갗은 8월 뙤약볕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이제 됐다.' 하는 마음으로 서울 가는 버스표를 끊었고, 내가 자전거로 5일 내리 달려온 거리를 버스는 3시간이 채 되지 않아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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