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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바벨 Apr 29. 2019

걔와의 연애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대답이 되는 것들 때문이었다.

2년 하고 7개월. 걔와의 연애 기간.


구질구질한 시절에 만나, 서로의 마음을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지속 가능한 연애를 했다.

만남과 헤어짐을 5번 정도 반복했을 때 비로소 더 이상 반복할 일이 없어졌다.

우리는 헤어짐으로 반복을 마무리했다.


나는 걔를 옴팡지게 좋아했다.

속기사라도 된 마냥 걔가 말한 수많은 음악과 영화와 맛집을 놓치지 않으려 핸드폰에 기록했고,

그에 못지않게 수많은 핑계들로 미뤄대다 결국 기록의 반도 함께하지 못했지만 걔가 선호하는 모든 것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무슨 영화 좋아해?"라고 물어보면 감독의 이름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내가 아는 감독은 없었다. 박찬욱, 봉준호가 아니었으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음.. 히레카츠 생각난다.'

'자비에 돌란? 자비.. 불교 신자인가?'

'미셸 공드리? 뭘 공들인다고?'

짐 자무쉬가 도대체 왜 좋은지는 영화를 봐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상의 밤을 보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이터널 선샤인을 모르냐고 화내는 걔에게 "아, 알아! 그.. 누구더라.. 짐 캐리 나오는 영화! 그게 짐 자무쉬 영화야?"라고 하는 나를 안타깝게 쳐다보던 걔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참 좋아했다. 가끔은 그 표정이 보고 싶어 일부러 바보 같은 짓을 하기도 했다.


나는 걔를 공부했다. 걔가 호하는 것들을 듣고 보고 외우고 따라 하는 게 걔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라떼는 저어 마시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고,

버니니는 바나나가 오타 난 게 아니라 술이라는 것도 걔 덕분에 알았다.


베스트셀러 에세이보다 고전소설에 더 손이 갔고,

멜론 Top100보다 먼 나라 뮤지션들의 음악을 더 들었다.


정치하면 조정치부터 떠올리던 내가 연예란보다 정치란 기사를 더 클릭하게 됐고,

올림픽홀이 아니라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걔는 나에게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며 이런저런 정치 얘기로 자주 분노했는데,

나는 걔의 분노가 충분히 성숙해 보였다.


화가 난 걔 이마에 지렁이 세 마리가 생기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신이 나면 개구쟁이가 되어 나를 못살게 구는 모습도 좋았다.


걔도 나를 옴팡지게 좋아해줬다.

내가 온갖 표현과 갖은 노력을 해서 걔를 앞질렀다 생각하고 우쭐대면, 걔는 손쉽게 자신의 사랑이 나보다 크다는 걸 증명했다.

"가장 훌륭한 사진이 어떤 거게?"

"어떤 건데?"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담긴 사진이야."라고 말하며 내 사진을 찍어주던 걔의 표정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이었다.


우리는 옴팡지게 좋아했으니 옴팡지게 좋은 일들로 채워졌어야 했는데 이별을 했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대답이 되는 것들 때문이었다.

가령. 자고 있어야 할 시간에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버렸거나.

같이 기대했던 영화를 암묵적으로 제외하고 다른 영화를 예매한다거나.

가고 싶어 했던 식당을 더 이상 가려고 하지 않는다거나.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는다거나.


누구 하나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옴팡져 많이 울었던 탓에 마음까지 습기가 차 곰팡이가 생겨버린 것 같았다.


어느새 걔가 호하던 것들은 스며들어와 나를 이루고 있는데 걔는 없다는 사실에 자주 공허했다.

그 공허함은 친구를 만나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일에 몰두하는 걸로 채워지지 않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별 한참 후에 핸드폰 사진을 정리하다가 내 사진을 찍어주던 걔의 표정이 생각났다.


어디서든 그런 표정으로 반짝이고 있었으면.


우리가 했던 수많은 약속과 손쉽던 말들이 떠오르더라도 쉬이 웃어넘길 수 있는 날들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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