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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바벨 Oct 24. 2021

숙식제공 제주살이

그런 그들을 바라볼 때면 나는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어느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싱어송라이터 계약을 맺고 스물여덟이 된 나는 제주도 갈치구이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와봤던 게 다였다. 버스에 실려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했던 기억뿐, 제주도에 대한 감흥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제주도를 선택한 이유는 섬이었고 자연이었고, 돈이었기 때문이다. 섬이라는 건 혼자가 되어본다는 것을 의미했고, 자연이라는 건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겐 낭만이었다. 돈이라는 건 매달 갚아야 할 빚과 엄마의 병원비,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갈치구이 식당 과장님에게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북한산을 오르고 있었다. 족두리봉에서 제주도가 보일리 없는데도 먼 풍경을 바라보며 저기는 어디쯤일까 생각했을 것이다. 과장님은 서울에 살고 있는 나를 면접 때문에 제주도로 오라고 할 순 없으니 전화로 면접을 봐도 괜찮겠냐고 먼저 물어봐 주면서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타지인으로서 현지인들과 일하게 될 경우, 많은 경우로 경우 없는 상황을 겪을 거라고 짐작했던 걸 뒤집어 어쩌면 오히려 경위가 밝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 만약 과장님이 라떼를 좋아하는 분이거나, 아날로그식 사고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다면 비행기 티켓을 끊고 면접 보러 올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화로 합격 통보를 받은 나는 출근 이틀 전에 먼저 제주도로 내려와서 여행을 했다. 20살 때 했던 자전거 여행 이후 혼자 여행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이틀 뒤면 다시 열심히 살게 되겠지만 그래도 쉬는 날마다 제주도를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됐다. 그렇게 유유한 이틀의 제주를 맛본 나는 이윽고 갈치구이 식당의 스케일을 맛보며 감탄하게 되었다. 2400만 원 정도의 매출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월 매출이 아니라 일 매출이었다. 1800만 원 정도의 매출이 나오는 날은 "오늘 손님 왜 이렇게 없지?"라고 말하는 날이었다. 많이 파는 날은 3500만 원을 웃돌았다. 알고 보니 이곳은 제주도에서 내로라하는 매출을 자랑하는 식당이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은 분명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이곳에서 사장님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배우고 나와 성공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사장님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아내기 전에 그만두어 차마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사장님의 성공 스토리는 알고 있다. 사장님은 앞서 다섯 번 정도의 장사를 말아 드신 뒤, 마침내 방송에 나오게 되면서 대박이 터졌다고 했다. 아마 사장님이 가진 능력의 이름은 '존버(존중하며 버티기)'였지 싶다. 개인적으로 이제 나는 존버의 앞글자 '존'이 '존중'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자주 상기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버티는 동안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이 행복과 큰 연관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간 나는 '존중하며 버티기'가 아니라 '존나 버티기'를 해왔다. 문제는 내가 있는 곳이 사막이었다는 것이다.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오래된 미완성 지도를 들고 나침반도 없이 아무렇게나 뛰어다니며 무언가 나오기만을 바랐다. 그러다 우연히 오아시스를 발견해 미친 듯이 달려가 보면 신기루였으며, 걸핏하면 모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댔다. 나는 언제부턴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고, 나아가기엔 지쳐버렸다고 느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의 특성을 파악하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돌볼 수 있어야지,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달리다 보면 불현듯 번아웃이 찾아올 수 있다. 나는 여러 번 아웃됐다.


갈치구이 식당에는 40명가량의 직원들이 근무를 했다. 나는 우선 수많은 동료들의 직급과 이름을 외워야 했는데 나도 어려웠지만 그들도 내 이름을 외우기가 어려웠는지 자주 나를 '문 뭐더라'라고 불렀다. 40번대 수습직원 문 뭐더라는 반반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홀직원이 되어 전장에 투입됐다. 문 뭐더라도 주방보다는 홀에서 일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갈치 전장에서는 팔 길이만큼 길고 무거운 접시(서울에서 보지 못한 크기의 갈치가 담겨 있었다.)를 쉴 새 없이 날라야 했고, 동시에 머리로는 다른 손님들이 시킨 걸 되새기면서 눈은 멀리 시선을 두고 내다봐야 했다. 정신없는 탓에 함부로 대하기 쉬운 환경인 건지 직원들끼리는 만만해 보인다 싶으면 욕도 자주 했고 텃세도 있었다. 감정 조절이 어려워 보이는 헐크도 있었고, 정신력이 어떤 능력보다도 대단하다는 걸 보여준 블랙 위도우도 있었다. 나는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딱히 활약도 없는 호크아이, 아니 호구 아이였다.


나날이 피로해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 생각보다 힘든 곳이었군요. 제가 오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퇴사해보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오늘까지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지금에 집중했다. 엄마와 지인들에게도 이미 선포를 하고 온 터라 다시 돌아가는 것도 좀 뻘쭘한 일이었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서울이 아니라 갈치구이 식당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숙소였다. 그곳은 지금껏 내가 살아온 곳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평수의 아파트였는데, 처음만 좋았지 넓으니까 청소만 힘들었다. 평수가 큰 만큼 사람도 많았기에 딱히 개인적인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왜 현대 건축의 거장 르꼬르뷔지에가 말년에 4평 남짓한 집에서 지냈는지 알 것 같았다. 역시 튜닝의 끝은 순정이고, 풀소유의 끝은 무소유였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이곳에서도 버티다 보니 시간은 흘렀다. 친구가 생일 선물로 보내준 3만 원짜리 리복 신발을 동력 삼아 빨빨거리며 움직인 지 두 달이 넘어갈 즈음부터 나도 이곳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텃세를 부리던 이들도 알고 보니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일이 힘든 탓에 금방 그만두거나 몰래 짐을 싸서 도망가는 일이 빈번하다 보니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들에게 텃세는 일종의 테스트였던 셈이다. 이곳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진지하게 일하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런 경우가 반복된다는 게 꽤나 힘 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때도 그렇고 이후에 한샘에서 일을 할 때도 자주 느꼈는데, 고된 하루를 매일 반복하면서 남을 해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세계를 밀도 있고 견고하게 지켜나가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막상 그들에게 물어보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게 사는 사람들이다. 불가능한 것을 바라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고, 자신이 맺고 있는 인연에 책임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 그들을 바라볼 때면 나는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나와는 다르게 그들은 사람을 들이는 것에 대한 책임도 알고 있었고, 막연한 희망보다는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에서 최대한의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들이 부러운 마음과, 그래도 나는 내 방식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마냥 행복한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들도 저마다의 아픔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가 이 사실만이라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타인에게 조금은 더 다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최소한 실례라도 더 적게 범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질이야 어찌 됐건 월급 날 내 계좌에 들어온 2,500,000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는 일은 꽤 좋은 경험이었다. 그간 200만 원이 넘는 실수령액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터라 많은 돈처럼 느껴졌다. 엄마에게 100만 원을 보내고 80만 정도의 빚을 갚고도 70만 원 정도가 남았다. 그 덕에 쉬는 날을 만끽할 수 있었다.


쉬는 날 아침이 되면 숙소 근처에 있는 동네 목욕탕을 갔다. 입구부터 음침한 그야말로 로컬 목욕탕이었고 내가 갈 때면 늘 사람이 없거나 한두 명 있을 뿐이었다. 널찍한 탕에 들어가 벽면에 설치된 TV를 보며 피로를 풀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온탕과 냉탕을 10분 정도의 간격으로 왔다 갔다 하며 세포 하나하나 살아있음을 느끼는 목욕법을 선호했는데, 나중에 이걸 냉온욕이라는 말로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인 냉온욕의 실천자로 고 송해 선생님과 고 정주영 회장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냉온욕은 장수의 비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의도치 않게 장수 목욕법을 계승하던 나는 목욕을 마치면 제주 음식들을 찾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갔다. 그곳에서 멍 때리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제주에 와 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그리고 불과 몇달 전까지 서울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 내가 상상하는 충만한 행복의 모습이 제주와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터넷만 되면 집에서 안 나가도 딱히 답답함을 못 느끼는 나지만, 제주에 집 하나 사서 테라스에 앉아 자연 바라보며 원격으로 일하면 그야말로 개꿀처럼 달콤할 것 같았다. 그런 날이 오면 나는 꼭 우효의 민들레와 검정치마의 TEAM BABY 앨범을 틀어놓을 것이다.


내가 제주 생활에 변덕 혹은 각성을 하게 된 건 식당에서 일한 지 세 달이 되어갈 즈음 시간당 페이를 계산해 본 후부터였다. 월급을 내가 식당에 머무르는 시간으로 따져보니 최저시급 수준이었다. 나는 '그렇다면 꼭 이곳에서 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식당을 차리려는 것도 아니고, 식당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카페에서 일하는 게 나한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이런 시스템의 카페는 없을까?'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웃어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배부르고 등 따숩다고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피로가 쌓인 탓에 높아진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생존과 상생을 이루는 타협점을 제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후 나는 내가 생각했던 조건에 적합한 카페를 찾아냈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숙식 제공이었고 월급은 식당보다 40만 원 정도 적었지만 하루 13시간 정도 식당에 머무르던 걸 생각하면 9시간 머무르는 카페 일은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간 카페에서 일만 해봤지 커피를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은 없었기에, 라마르조꼬 커피 머신과 국제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진 사장님이 자신과 함께 성장해보자고 제안한 것에 나는 이미 매료되어 있었다. 그렇게 환승 이직에 성공하며 식당에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식당은 언제나 직원들이 들락날락했기에 일을 그만두는 것에 문제 되는 부분이 없었지만 나에게 정을 준 직원들은 서운해했다. 그들은 내가 그만둘 줄은 몰랐다면서 나를 회유하고 붙잡았다. 나 역시 한편으론 그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식당을 그만두고 숙소에서 짐을 챙겨 나오자 카페 사장님에게 문제가 생겼다. 사장님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본인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내가 지낼 곳을 알아봐 주었다. 소개해 주신 분은 전직 경찰이었는데 경찰 일을 그만두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기타 치고, 노래하고, 바다 수영을 하며 가족과 유유자적 사시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세이 형님이라고 불렀다. 본명은 알지 못한다. 내가 호칭을 뭐라고 해야 좋을지 여쭤보니 그냥 세이 형님이라고 부르라 하셨다. 흥미로운 이력을 자랑하는 세이 형님은 좋은 분이셨다. 불편한 티 내지 않고 나를 본인의 작업실에서 재워주셨고 술도 사주셨다. 세이 형님도 음악을 하는 터라 음악을 하고 있던 나에게 호의를 베푸신 것 같았다.


우리는 음악 이야기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이야기 도중 내가 계약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이름을 얘기하니 갑자기 형님이 반가워하셨다. 본인이 갖고 있는 다른 건물에 술집이 있는데 그곳을 운영하는 분이 나랑 같은 회사의 뮤지션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제주도에 나랑 같은 회사 뮤지션이 있다는 것에 놀랐던 만큼이나 세이 형님이 또 다른 건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며칠 후 세이 형님은 그분이 운영하는 술집에 나를 데리고 가주셨다. 두 분 다 나에겐 큰삼촌뻘이었다. 서울에서도 보지 못한 회사 뮤지션을 제주도에서 보게 되다니,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나는 두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이 형님은 그분이 하는 인디밴드의 팬이었고, 인연이 되어 그분이 제주도까지 내려와 세이 형님의 건물에서 영업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그분의 밴드 이름을 들어보기만 한 정도였다. 그런데 나중에 찾아보니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상도 받은 대단한 밴드였다. 내가 좋아하는 앰비언트한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분에게 이제 음악은 아예 안하시는 건지 여쭤보려다 참았는데, 중간중간 그분의 이야기를 조합해 보니 음악 활동을 계속 해나가실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겐 무어라 정의해야 좋을지 모를 남다른 분위기가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4년이 지난 후,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나는 불현듯 드라마 메인 OST 곡에서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 언젠가 경험했던 유니크한 분위기였다. 바로 검색해보니 역시나 그분의 밴드 노래였다. 그때 나는 친했던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지구력이 참 대단한 분이구나 생각했고, 문득 그 4년간의 시간이 궁금했다.


본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던가. 4년 새 세이 형님은 5집 앨범까지 낸 싱어송라이터가 되어 있었다. 그때 내가 묵은 작업실에서 홀로 녹음을 하고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앨범을 판매하는 이른바 낭만파 뮤지션이었다. 여전히 공연도 하고 농구도 자주 하시는 것 같은데, 어떤 날은 시간이 없었는지 농구복을 입고 공연을 하셨다. 정말 여전히 멋진 형님이시다. 농구복이면 어떻고 농부복이면 또 어떤가. 자신의 우주를 다채롭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진다.


나의 제주살이는 세이 형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막을 내렸다. 카페 사장님은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나는 게스트하우스 건물 옥상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바다 노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세이 형님은 지인들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를 소개해 준다고 하셨지만 내가 살아가기엔 모자란 월급이었다. 나는 우선 다시 서울로 올라가 일자리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슬펐던 기억은 없다. 그저 얼른 일을 구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했고, 엄마는 반가워했다. 그리고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병원에 다시 입원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당뇨, 고혈압,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 입원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몇 달 만에 마주한 엄마는 몰라보게 살이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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