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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Gibran Aug 01. 2020

빗방울

지구대, 야간근무 중에

태풍과 장마전선이 빚어낸 폭우는 어제부터 줄곧 내렸다. 

야간근무이다. 

내리는 비만큼 112 신고도 내렸다. 

하나둘씩 신고는 우리의 수고로움에 그쳤다. 

새벽 4시쯤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다. 

비로 인해 순찰은 포기하고 한 곳에 섰다. 

와이퍼를 멈추고, 앞 창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본다. 

투명한 유리에 흔적을 남긴다. 

내 눈을 흐리게 한다. 

아직 아침이 오려면 멀었다. 

어둡다. 아마 낮이라도 어두울 것 같다. 비를 내리는 먹구름은 지금 어두움보다 더 짙다. 

가로등 불빛이 줄지어 눈을 뜨고 있다. 

오로지 가로등과 우리뿐이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은. 


빗소리는 요란하다. 그 소리에 리듬을 탄다. 

이어폰을 꽂는다. 음악을 들었다. 

박효신의 노래를 나도 모르게 눌렀다. 

예전에 '야생화'만을 무한반복으로 들었었다. 

오늘은 숨, 바보, 동행, 눈의 꽃도 들었다. 

그러다, 야생화만 결국 들었다. 

마치 큰 전쟁을 치르고 난 뒤 찾아온 고요가 주는 여유다. 

차창에 빗방울이 얼굴을 그린다. 

10대 때 좋아했던 음악 선생님, 

20살에 만난, 지금은 내 친구의 아내가 된 첫사랑, 

지난주에 죽은 사촌 형, 

나와 같은 공방에 다니며 남동생의 장례를 치르던 29살의 수강생, 

그녀의 동생은 27살에 혈액암으로 며칠 전 죽었다. 

호전된다고 소망을 품다 세 번째 재발되어 결국, 

그의 인스타에는 왜 나에게 이런 병이 걸렸는지 원망하지만 살고 싶다는 기도문이 있었다. 

그의 영정사진은 웃고 있다. 인스타에도 누나와 웃는 모습이 있다.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은 없고, 얼굴은 검게 변했었다. 

유독, 그 얼굴만 무한 반복하는 야생화처럼 떠올랐다.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해 나를 맞이한 그의 아버지, 

차마 슬퍼 그를 보내지 못하는 그의 어머니, 

병상에 있는 그를 사랑한 일본인 여자 친구, 

그리고, 여경이 되고 싶다는 그의 누나. 

그들에게 그는 이제 영원이다. 

야생화가 되기를. 


빗방울처럼 금방 사라진다. 

나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렇다. 

영원이 될 사람을 사랑하자. 


나는 오늘 '빗방울'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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