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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Gibran Jul 30. 2020

상실


살아갈 아무 의지가 없고,
살아갈 아무 의미가 없는,
그런 눈을 보았다.

ㅇㅇ지구대 보호석에 앉아 있다.
그녀의 머리는 어깨를 지나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빗질을 하지 않았는지 정수리 부분은 헝클어져 있었다.
몇 분 전 그녀는 20층 건물의 옥상에 홀로 서 있었다.
어딘가로 떠나려고 여행용 가방을 들고.
건물 관리인이 그녀를 보고 신고하였다.
가만히 두었으면 옥상 난간을 넘었을 것이다.
그녀를 강제로 옥상에서 지구대로 데리고 왔다.
인적사항을 확인하다 모두가 놀랬다.
그녀는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엄연한 남자였다.
그는 트랜스젠더였다. 남자에서 여자로.
왜 그는 그런 눈빛이었을까?
일주일 전 그가 사랑했던 연인이 떠났다.
홀로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 연인도 남자다.

그 두 사람에게는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만이 존재할 뿐.
왜 먼저 갔는지 알 수 없으나
남겨진 그의 눈빛은 상실 그 자체였다.
그때 그런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막연했다.


" 상실의 기술을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것들이 본래부터 상실될 의도로 채워진 듯하니 그것들을 잃는다고 재앙은 아니다."


이 문장은 엘리자베스 비숍의 '상실의 기술'이라는 시의 첫 단락이다.

동성애자였던 엘리자베스 비숍의 이 시를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어쩌면, 그는 그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한 사랑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서 오는 상실감을 그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리라.
가끔 그의 눈빛이 떠오른다.
내게도 그런 눈빛이 있지 않을까?

이 시를 소개한 류시화 시인은 ‘시로 납치하다.’에서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은 소유하고 경험하고 연결되기 위해 태어나지만 생을 마치는 날까지 하나씩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삶의 역설이다.

잃어버린 것에 아파하되 그 상실을 껴안는 것을 에머슨은 ‘아름다운 필연’이라 불렀다. 상실은 가장 큰 인생 수업이다.

이 수업을 듣고 싶지 않지만 들을 수밖에 없으니 종이 울리고 책상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가며 큰 깨달음과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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