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의 기억으로 기억하는 나의 과거
그와 함께 있으면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공허가
그의 침묵과 맞닿는 듯했다.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속성을 공유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어느 여름,
그는 오래동안 비어있던 할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필름 더미를 마주했다 했다.
“할아버지의 스튜디오를 혼자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어.
제일 먼저 부딪힌 건, 감당할 수 없는 양의 필름이었지.
필름은 할아버지 인생 그 자체였으니까.”
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혼자 정리해요? 부모님은요?”
내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셨어. 사실 전혀 기억나지 않아.
나는 단지 할아버지의 말씀을 통해서 부모님을 기억해.“
그 말이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기억이 아닌, 누군가의 말이나 시선,
혹은 특별한 물건 하나 속에서 되살려낸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직접 겪은 일조차 어머니의 이야기, 아버지의 표정...
또 누군가의 증언을 통해
다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기억은 처음부터
완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해석, 누군가의 감정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새로운 생명.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과거'일지도 모른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진이 좋아.
다른 사람의 기억을 빌려 나를 기억하고 싶지 않거든.”
사진은 순간을 붙잡는다.
셔터를 누르는 사람의 시선, 찰나의 빛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나는 지갑 속에 있는 어린시절 사진을 꺼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그들의 이야기로 존재한다.
웃음이 났다.
나를 기억하는 방식조차
누군가의 시선과 목소리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니.
과거는
결국, 나와 타인이 함께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
아니, 어쩌면
서로의 기억을 빌려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암실 속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