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돌이 Jan 22. 2016

퇴사 인수인계를 둘러싼 이야기

#문돌이 #퇴사결심 #100일

“인수인계는 얼마나 해야 하나요?”

“나가서 연락 안 받을 만큼”


    퇴사일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서랍 정리다. 지금까지 해왔던 업무 자료와 앞으로 쓰일지도 몰라 일단 쌓아놨던 서류들을 싹 꺼냈다. 중간에 정리할 법도 했는데 신입으로 들어와 OJT를 받을 때 사용한 자료들도 아직 남아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필기를 했는지 종이의 여백이 파란색, 빨간색 글자로 가득하다. 서랍의 맨  아래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걸 보니 그 뒤로 꺼낸 적이 없나 보다. OJT 자료를 파쇄기에 넣으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뭐든지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을 했던 기억도 함께 사라지는 느낌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석한 수많은 회의 자료들도 두 번째 서랍에 수북하다. 서랍이 많은 책상이라 업무와 참고자료 정도는 구분을 해두었기에 망정이지 서랍 정리에 하루를 꼬박 보낼 뻔했다. 책상을 가득 채운 자료 중 인수인계에 필요한 자료와 없는 자료로 나누어 정리했다.

 

    부산스럽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옆 부서 선배가 지나가다 한 마디 했다.


“연말도 아닌데 벌써부터 대청소야? 퇴사라도 하려고?”

“네 제가 따로  말씀드리려 했는데 죄송합니다”

“헉..”


    퇴사일까지 기간이 좀 남았기에 아직 다른 부서에는 퇴사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이렇게 커밍아웃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던진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 선배는 잠시 후 메신저로 커피 한 잔 하자는 쪽지를 보냈다. 모두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데 서랍을  뒤집어엎는 모습이 영락없는 퇴사자로 보였나 보다.


    서랍의 맨 아래칸에는 각종 계약서와 결재문서가 파일철에 담겨 있다. 다음 해 계약은 아직 기간이 남았으니 손댈 곳이 없지만 결재 문서는 정리가 필요했다. 파일철은  구분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 순서대로 끼워두기만 한 탓이다. 이제는 손에 익은 펀치로 구멍을 뚫어 문서들을 가지런히 정돈한다.


    이제야 인수인계서를 작성할 준비를 마쳤다. 퇴사 전 인사담당자에게 제출해야 하는 서류 가운데 결재를 받은 인수인계서가 있어 양식은 해결했다. 한 장 짜리 양식은 하고 있던 업무 리스트만 적어도 충분하기에 걱정은 없다. 그런데 대체 인수인계는 얼마나 해야 하는 걸까?


    정답은 없지만 퇴사한 이후에 업무와 관련된 연락이 오지 않는 수준이 좋다. 이 정도면 사실 충분하고도 넘친다. 업무를 넘길 사람이 바로 정해진다면 좋겠지만 회사의 인력은 원하는 시기에 바로 채워지지 않는다. 정말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퇴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업무 내용만 정리하고 퇴사하는 경우 얼마 뒤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와서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일들을 묻는 일도 있다.   


    퇴사 후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단순히 업무 리스트를 정리해서 넘겨주고 끝나는 인수인계가 아니라 업무의 특성 및 특이사항까지 챙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주요 거래선은 어디이며 담당자의 특성과 현재 업무 진행 간 이슈사항까지 자세하게 넘겨줘야 나중에 탈이 없다.


    인수인계서 초안은 금방 끝났다. 사소한 업무도 놓치지 않기 위해 업무를 체크리스트화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여러 업무를 진행할 경우 체크리스트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필자는 체크리스트에 진행 경과와 특이사항까지 같이 기록을 해두었기에 그대로 인수인계서로 활용할 수 있었다.

    부서장에게 작성한 인수인계서를 한 부 제출하고 실제 인수인계에 돌입한다. 월 마감과 각종 지표 정리는 루틴 한 일이기 때문에 관리하고 있는 엑셀 파일의 활용 방법을 설명했다. 매달 하는 일이라 직접 하는 건 익숙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건 꽤나 어려운 작업이다. 왕도는 없다. 문서를  백업한 후 똑같은 결과가 나오도록 반복해서 숙달하는 게 제일 빠르다.


    체크리스트에 살을 붙여 인수인계 문서를 작성하니 항목이 20개도 넘었다. 단순 취합 업무에서 사무용품 정산하는 내용까지 다 적었기 때문이다. 정말 작은 일이지만 부서에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그 일은 보통 막내의 몫이었다.


    인수인계를 하면서 군대 생각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해 지옥을 경험했다. 전역을 앞둔 선임의 마음은 이미  바깥세상에 있었고 필사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을 뽑아내기 위해  달라붙었지만 실패했다.


“야 이 정도면 인수인계 다 한 거지. 나 처음 왔을 때는 전임자도 없어서 내가 다 만들었어”

“아닙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설명해주십시오”


    선임은 그렇게 떠나버렸고 그 후 3개월은 지옥이었다. 미숙한 업무 처리로 퇴근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전역 후에도 간간이 전화를 받아주던 선배의 목소리는 점점 어두워졌고 필자의 앞날도 캄캄해졌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자리를 잡고 나니 남은 건 다크서클과 뱃살뿐이었다. 평소엔 먹지도 않던 믹스 커피를 하루에 몇 잔씩 들이켰다.


    인수인계는 ‘나중에 연락이 오지 않을 정도’라는 기준을 세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결심 후 해야 할 3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