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그룹 연수과정을 모두 마치고 부서에 처음 가면 정신이 없다. 어떻게 인사를 할지부터 어떻게 해야 센스 있는 신입사원으로 비칠지 고민에 휩싸인다. PC 지급이 늦어져서 그냥 비어 있는 책상에 앉게 된다면?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앞으로 일할 부서가 정해지고 전산에 부서명이 딱 박히는 순간 공식적으로는 해당 부서의 일원이 된다. PC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보니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뭐라고 해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어리바리 일과를 보내고 회식 장소로 이동을 했다. 전산적인 절차의 일원이 아니라 진정한 팀원이 되기 위한 의식을 주(酒)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다.
돌아가는 술잔 가운데 당신이 챙겨야 할 것은 단 두 가지다. 정신과 개념이다. 정신을 바짝 챙기고 있다면 개념은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테니 두 가지를 챙길 여력이 없다면 정신을 우선순위로 챙기면 된다. 웬만큼 술을 마신다는 사람도 잔 돌리기 기술에 휘말리게 되면 혼자서 팀원 전체를 상대하다 KO 되는 건 시간문제다.
신입사원 주제에 계속 자리를 비울 수도 없기 때문에 주(酒)님이 주시는 만취라는 은총을 거부하려면 개인 물병이라도 준비해서 틈날 때마다 마셔야 한다. 신기한 것은 내가 이렇게 술을 잘 마셨나 싶을 정도로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 죽으면 회사생활도 함께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필살의 정신력을 발휘해서 깨어 있는 것이다.
정신이 혼미해지더라도 준비한 건배사는 완벽하게 말해야 한다. 앞에 있는 잔을 채워 달라 요청하고 앞으로 회사생활의 포부를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게 말한 후 선창을 통해 선배님들의 호쾌한 후창을 끌어낸다면 성공이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뻔한 건배사 말고 본인의 스토리가 들어가 있는 자연스러운 건배사를 해야 실패 확률이 적다.
이후에는 건배사를 할 일이 없었다. 건배사라는 형식에 매인 회식보다는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즐기는 게 회식이라는 팀장님의 의견에 따라 건배사 없는 회식을 했다. 건배사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 회식 15분 전에 가서 자리를 최종 세팅하는 것 정도는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도 할 수 있었다.
'야근하느라 회식이 없었다는 점은 큰 함정'
시간이 흘러 퇴사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송별회 일정이 잡혔고 회식 장소를 예약하기 위해 맛집을 찾아 예약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건 여전히 막내인 나의 몫이었다. 마지막 가는 회식을 스스로 체크하니 정말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느낌이었다. 후보지가 추려졌는데 최종 예약은 사수 선배가 대신해주었다. 송별회 당사자가 식당 예약을 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는 선배의 배려였다.
메뉴 선정에도 당사자의 입김(?)이 작용하여 비싸고 맛있는 음식으로 결정됐다. 비싼 와인도 등장했다. 퇴사 송별회는 신입 환영회와 비교하면 긴장감이 없었다.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들보다 더 얼굴을 많이 본 동료라서 그런 것 같다. 퇴사를 앞둔 팀의 막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선배들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훈훈한 마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퇴사를 앞두면 하루 걸러 하루가 회식 날이다. 유관 부서 사람들과의 회식, 동기 회식 등 회식의 연속이다. 그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회식이 하나 있다. 일명 사내 ‘꾸러기 모임 회식’이다. 회사에서 지양하는 사조직 같은 모임이 아니라 그냥 나이가 젊은 사원들이 회사 생활의 고충을 안주 삼아 소주 한 잔을 들이키던 소소한 모임이다. 퇴사 후에도 가끔씩 연락하고 만나기도 하는 소중한 인연이다. 필자를 제외하면 모두 아직 남아 있기에 그들의 모임에 내가 초대받는 경우가 많다.
회식은 퇴사일을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까지 이어졌다. 퇴사를 앞둔 회식은 중요한 자리다. 회사 생활의 시작을 회식으로 열었다면 닫는 과정에도 회식이 포함된다. 회사 내에 철천지원수가 서식하고 있더라도 웃는 얼굴로 마무리해야 한다. 술에 취해서 ‘그동안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등의 말을 하는 실수는 없어야 한다. 속으로는 들고 있는 술잔을 얼굴에 끼얹고 싶을지언정 겉으로는 건배를 외치는 게 이기는 행동이다. 주(酒)님의 힘을 빌어서야 할 수 있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낫다. 한이 뼈에 사무친다면 차라리 제정신일 때 하고 아니라면 후일을 도모하자.
긴장감 넘쳤던 첫 회식도, 부담감 없었던 마지막 회식도 지금은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