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파우스트』
방황은 비단 비행청소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록 표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사춘기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내면적인 마음의 방황을 겪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방황이라는 상태가 부모와 가정이라는 안정장치를 동여맨 청소년만의 특권인가? 꼭 그렇지도 않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방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오히려 어른의 방황은 청소년의 방황보다 범주가 넓다. 청소년기의 친구와의 관계나 진로에 대한 고민에서 파생되는 방황의 한정된 범주를 벗어나, 경제, 사회, 정치 등 다양한 영역으로 그 넓이가 확장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방황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상태이자 전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의 실존적 문제인 셈이다.
방황하는 인간은 질문한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마치 배의 방향키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괴로워하는 조타수의 모양이다. 방황하는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거니와 어떤 일에 착수하더라도 잘하고 있는 건지 몰라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다. 또한 무엇을 하더라도 그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에 힘들어한다. 우리네 인생에서의 방황은 망망대해에서의 표류와 유사하다. 방황은 방황의 주체에게 삶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연속적으로 부여한다. 방황하는 자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상태에 빠진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빨리 안정적인 상태로 만들어 주세요!”
개인의 방황은 시대의 안정성이 흔들릴수록 더욱 심화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격동의 시대라고 한다면, 현대인들의 방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황이 청소년만의 특권이 아니듯이 격동도 현대만의 특징이 아니다. 과거에도 시대는 항상 격동이라는 진통을 겪어왔다.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대표적인 방황의 아이콘일 것이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19세기 독일은 사회적, 사상적, 문학적으로 혼란한 시대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가 겪는 현대의 격동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7년 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침략은 독일 사회의 혼란을 일으켰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이후 본격화된 휴머니즘이 기존의 기독교적 전통, 게르만 신비주의와 혼재되면서 사상적으로도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사상적 충돌은 필연적으로 예술의 변화를 촉발하는 법이다. 문학가 괴테 또한 인간의 천재성을 맹신하는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사조, 고대 그리스의 예술 양식을 동경하는 고전주의, 자유분방한 개성을 중시하고 이상적 세계를 그리는 낭만주의의 혼돈 속에서 몸부림쳤다.
방황이 초래하는 불안과 위태로움이 분명 괴테에게도 찾아왔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 속 인간의 방황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는 괴테가 『파우스트』라는 대작을 집필하는 5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쥐고 있던 문제였다. 우리는 『파우스트』에서 방황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괴테의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다양한 고민을 떠안아 방황하는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고, 격동의 시대가 괴테를 시대 한가운데에 놓은 것처럼,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도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인물 파우스트를 구심점으로 삼는다. 『파우스트』는 천국의 주님과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가 파우스트를 두고 내기하는 장면으로 막이 오른다. 그들의 내기는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극명한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주님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설사 방황하더라도 타락하지 않고 옳은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메피스토펠레스는 악마답게도 인간을 방황하면 타락할 수밖에 없는 추한 존재로 여긴다. 인간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팽배하게 대립하면서 주님과 악마는 파우스트의 타락 여부를 두고 내기에 돌입한다.
그들이 내기 대상으로 삼은 파우스트는 평생 동안 학문적 진리를 탐구하다가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좌절하는 노인이다. 그런 그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접근해 계약서를 내민다. “갑(메피스토펠레스)은 을(파우스트)이 책과 학문이 아닌 삶과 세상을 체험하도록 젊음, 부, 능력을 양도함.” 담보는 을의 영혼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그가 세상을 체험하다가 세속의 순간에 집착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면 영혼을 차지하겠다고 선언한다. 다소 소름끼치는 계약이지만 파우스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계약이다. 욕망에 휩쓸려 순간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세상만사의 즐거움을 모두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학문의 세계를 벗어나 생생한 세상을 체험한다. 『파우스트』는 2개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파우스트의 시민사회 체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제2부는 궁정사회에서의 여정을 그린다. 시민사회와 궁정사회를 경험하면서 그는 그레트헨과 헬레나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실수로 애인의 오빠를 살해하며, 궁정에 채용돼 일을 하고, 해안지대의 영주로 발령받아 제방 사업에 착수한다. 요약하면 『파우스트』 스토리의 줄기는 파우스트의 ‘체험 삶의 현장’과 같다.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양도받은 젊음과 부와 능력을 활용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린다. 동시에 일과 사랑, 준법과 범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라면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파우스트는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극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파우스트의 최후 장면이다. 해안지대 영주의 자격으로 제방 사업에 착수하던 파우스트는 자연을 통제하고 개발하는 자신의 권력에 도취돼 힘껏 외친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이 장면은 방황하던 파우스트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이자, 악마가 주님에게 판정승을 거두는 것처럼 보이는 찰나다. 방황하는 우리의 자화상인 파우스트가 죽는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탄식을 금치 못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방황 속에서 욕망에 굴복하는 존재인가.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가련하고도 추악한 존재인가!
어쨌든 계약은 이행되어야 한다. 파우스트가 죽자 메피스토펠레스는 계약서에 적힌 대로 담보로 잡았던 그의 영혼을 거두기 위해 준비한다. 욕정의 상징인 배꼽을 통해 파우스트의 영혼이 나올 것이라 예상해, 그의 시체 옆에서 배꼽을 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타락한 줄만 알았던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원해 천국으로 데려간다. 파우스트의 영혼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었던 걸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주님과 악마의 내기 장면을 복기해야 한다. 주님은 인간이 방황하더라도 옳은 길을 찾는 존재라고 말했다. 악마는 인간이 방황하면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결국 두 관점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은 인간의 방황에 대한 견해다. 주님은 말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이 문장은 『파우스트』를 꿰뚫는 중심 명제이자 인간 삶의 의의에 대한 괴테의 대답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생각한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방황을 인간이 가진 내재적 한계이자 약점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욕망을 지닌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다. 메피스토펠레스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기에 주님과의 내기, 파우스트와의 계약에 자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마와는 다르게, 주님은 인간의 방황을 한계가 아닌 아름다움으로,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파악한다. 방황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또한 그것은 인간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은 노력하기 때문에 방황한다. 달리 말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자는 방황할 일도 없다. 방황의 제거는 평온과 안정의 상태가 아니라 미완과 안일의 상태다. 자신을 뛰어넘고 발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방황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방황으로 괴로워할지언정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달콤한 나태보다 쓰디 쓴 노력을 선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바로 방황이라는 위대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방황이 결국 인간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바람은 허무한 것이 되어버렸다. 악마의 바람대로 파우스트는 방황하는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주님의 예상대로 파우스트는 노력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주님은 그에게서 노력의 방증으로서의 방황을 보았기 때문에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세상을 진심으로 살아갔고 삶을 위해 노력했다. 노력. 이 숭고한 단어는 순결한 그레트헨과 사랑을 하고 유부녀 헬레나와 결혼했으며 여러 사람을 살해한 죄인 파우스트를 파멸 대신 구원으로 이끄는 열쇠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파우스트의 방황에 공감하는 이유는, 그가 겪는 방황이 형태만 다를 뿐 우리가 살면서 겪고 있는 방황과 굉장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이 직업을 잘 선택한 건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퇴직하면 어떻게 살지 막막합니다.” 스스로에게서 또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이와 같은 고민은 모두 방황의 흔적이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방황함은 곧 노력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은 우리의 나약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의 고민은 확실하게 우리의 노력을 가리킨다. 위의 고민에 빠져있다는 상태 자체가 우리가 삶 속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말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발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방황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만족하며 사는 삶은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노력하는 삶은 아니다. 방황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아름답다. 인간의 방황은 죄가 아니고 노력의 산물이라서 오히려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 지금 내가 방황하고 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자책하지 말자. 이는 곧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모두 마음껏 방황하라.
1749년 법률가이자 재력가인 아버지와 유복한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괴테는 어릴 때부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다. 아버지와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라틴어,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를 배운다. 괴테는 여러 언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종교, 그림, 첼로, 피아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소양을 쌓는다.
법률가인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갖기 원했기에, 괴테는 1765년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로 향한다. 그러나 오히려 법학이 아닌 예술에 매료된 괴테는 변호사가 된 후에도 문학 비평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한다.
결국 문학과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한 괴테는 본격적으로 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또한 정부 관리로 일하고 나중에는 재무장관에도 올랐으나 1786년 돌연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작품에 자극을 받은 그는 귀국 후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von Schiller)와 친분을 쌓는다.
괴테는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그몬트』, 『파우스트』와 같은 희곡은 물론, 시집과 장편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도 작품을 남긴다. 이에 더하여 생물학, 지질학, 색채론과 같이 문학 외에 다른 학문에서도 성과를 나타낸다. 이렇듯 문학과 학문에서 넓고 깊은 족적을 남긴 괴테는 183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
※ 추천도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1·2』,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