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삶이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되돌아보면 부담감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생겨나 지금까지 우리의 감정선과 궤를 같이해왔다. 일생이 부담감의 연속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학교를 다니는 학생 때에는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우리를 압박했다. 대학생이 되자 취직을 위한 스펙 쌓기가 삶을 짓눌렀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회인은 집, 대출과 같이 주로 재산에 관련된 부담감에 지배당하는 중이다. 부담은 우리네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부담감은 “~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부터 생겨난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해야 한다. 사회인은 재산을 불려야 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 스스로에게 의무와 책임을 강요하고 있는 꼴이다. 그런데 이처럼 삶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순간 삶은 즐거움에서 멀어진다. 부담감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땅히 즐거움이 차지해도 될 삶의 한가운데에 괴로움이 굴러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의 높은 성적과 직장에서의 업무 성과, 재산 증식의 성공은 행위자에게 기쁨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환희에 지나지 않는다. 환희의 유통기한이 끝나면 삶은 당위성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버무려진다.
우리는 참으로 우습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어깨에 부담감을 이고 있으니. 우리는 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가? 이러한 자학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살펴봐야 한다. 미래는 그 성격상 불확실하다. 불확실한 미래는 불안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불확실성이 인간에게 주는 불안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일종의 방어 기제를 구축한다. 미래의 분명한 목표를 하나 정하고, 목표 달성을 삶의 과업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세운 목표는 불확실한 미래에 조금의 확실성을 불어넣는다. 이를 통해 불안은 조금이나마 해소된다. 우리가 공부와 취직, 재산 증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이유도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함이다.
이러한 삶의 형태를 목적론적 삶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앞에서 말한 당위성, 부담감, 의무, 책임, 고통과 같은 삶의 괴로운 요소들이 피어오른다. 목적론적 삶의 초점은 미래를 겨냥하고 있기에 우리는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말하자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썩은 거름으로 삼아 미래의 꽃을 피우고 싶어 한다.
현대인의 삶은 목적론적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인간은 스스로 목적론적 삶을 선택해 괴로워한 걸까?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에 주목해야 한다. 니체는 수많은 철학자 중에서도 목적론적 삶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 중 하나다. 그 또한 즐거움으로 가득해도 모자랄 인간의 삶이 목적론적 형태를 띰으로써 괴로움으로 점철되는 현상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문제 해결에는 원인 파악이 선행하는 법. 니체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고통을 유발하는 목적론적 삶의 기원을 추적한다. 니체가 남긴 많은 저서 중에서도 그의 사상을 집약했다고 평가받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목적론적 삶에 대한 일종의 진단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등장인물이자 주인공인 현자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리자면, 괴로움의 원천인 목적론적 삶이 발생한 원인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원인은 종교, 특히 기독교다. 고대부터 근대, 심지어 니체가 죽은 지금까지도 기독교는 인간의 세계관과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 병든 자를 구원하는 선량한 기독교가 어째서 괴로움의 본원이라는 거지?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기독교에 대해 니체는 병적일 만큼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니체가 보기에 구원을 표방하는 기독교는 실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를 더욱 허덕이게 만들고 불쌍한 자의 처량함을 심화시키며 병든 자의 아픔을 쑤시는 종교다.
기독교의 주요 테마는 구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구원이라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 삶의 모든 것을 재단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기도, 금욕, 자기수행, 고행이라는 의무를 스스로 짊어진다. 육체적 쾌락처럼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만드는 쾌락은 철저히 배제된 채, 순수와 순결만이 가득한 맑은 영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기독교는 인간의 삶에 목적론적 형태를 강요한다. 지상에 발을 딛고 있는 현생이 아닌, 천국이라는 극단적으로 먼 미래의 행복이 더 중요시된다. 심지어 가난한 자, 불쌍한 자, 병든 자에게 확실한 구원을 약속해 그들의 가난과 동정, 병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목적론적 삶의 두 번째 원인은 인간 이성이다. 두 번째 원인에 대해서도 수긍보다는 의문이 먼저 떠오른다. 인류 문명과 문화의 진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이성이 왜 괴로움의 근원이라는 오명을 써야 하는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도 인간을 “이성을 가진 동물”로 칭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진보라는 단어의 지향점을 숙고해보면 이성과 목적론적 삶의 연결고리가 눈에 띌 것이다. 진보는 그 자체로 미래지향적이다.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발전에 방점을 찍는다. 다시 말해 진보는 미래에 대한 철저한 계획과 법칙을 세워 발전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계획과 법칙은 인간 이성만이 기획할 수 있는 고유한 콘텐츠다. 일정한 계획과 법칙을 준수하면 미래의 발전은 따 놓은 당상과 마찬가지다. 반대로 현재에 얽매인 감각과 감성은 진보에 쓸모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안정적인 발전 시스템을 방해하는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에 통제되어야 마땅하다. 감각과 감성을 통제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이성을 활용하여 규칙과 규율, 도덕과 윤리를 창조한다. 결과적으로 진보라는 목적을 위해 삶에서 현재의 즐거움과 쾌락이 희생당한다.
결국 인간은 종교와 이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좇아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켰다. 삶의 주인으로서 즐거움을 누릴 자격을 지닌 인간은 하나님의 종 및 이성의 통제 대상이라는 지위를 자처해버렸다. 노예에게 삶의 활력과 즐거움은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은 현재의 즐거움을 참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이 난치병은 지금까지도 극복되지 못했기에, 현대인들은 즐거움의 순간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진단서이기도 하지만 인류를 지배한 난치병에 대한 처방전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한 마디로 기독교적 가치의 종말을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동시에 그는 인간을 옭아매는 이성을 거부하고 생명력 넘치는 감각과 감성을 찬양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적으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맘껏 발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는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순수한 육체적 쾌락 또는 활력을 추구하려는 의지이고, 이차적으로는 강력한 주체성을 표방하고자 하는 의지다. 힘에의 의지를 제대로 발산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삶을 영위해나간다. 이는 내가 속한 집단이나 타인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일직선으로 고수한다는 말과 같다.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켜 삶의 주인으로서 자리매김하면 현재라는 순간을 긍정할 수 있다. 순간에 대한 긍정은 삶의 즐거움으로 연결된다.
힘에의 의지에 따라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위버멘쉬(Übermensch)로 발돋움한다. 위버멘쉬는 니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그는 힘에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삶의 주인으로 존재하는 강인한 인간이다. 독일어 ‘Übermensch’의 뜻을 풀어보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Über’는 상승과 극복의 의미를 지니는 접두사고, ‘Mensch’는 인간을 의미한다. 영어로 직역하면 ‘Overman’과 같다. 정리하자면 위버멘쉬는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해나가며 삶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상승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도 사람을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우리 인간이 즐거움을 되찾기 위해서는 수천 년 동안 고수해왔던 나약한 상태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종교와 이성이 말살시킨 우리의 힘에의 의지를 되살려야 할 때다. 현자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게 고한다.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땅으로 내리고, 발을 딛고 선 이 세상에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라!” 종교와 이성의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되찾으라는 말이다. 동시에 순수한 쾌락과 신체의 활력을 만끽하며 인간이 가진 본래적인 강인함을 회복하라는 의미다. 즐거운 삶은 타락의 길도 죄악의 길도 아니다. 인간은 삶의 즐거움에 대해 죄책감과 거북함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
니체는 위버멘쉬를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위버멘쉬는 사막에서 힘겹게 짐을 짊어진 낙타도 아니고, 자신을 속박했던 사슬에 적대감을 품은 사자도 아니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무한한 자유로움을 향유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위버멘쉬는 스스로의 주인이기에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해나갈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차라투스트라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벗어나 “하고자 한다”는 활동성에 진입하라고 강조한다.
니체는 종교와 이성을 거부함으로써 전임자들에 도전한다. 신이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능력인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은 플라톤(Platon), 데카르트(René Descartes), 칸트(Immanuel Kant),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사의 핵심 줄기였다. 진보와 발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표방하는 이성주의 철학은 현재를 희생시켜 미래를 지향하는 근대인의 삶의 양식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이런 뿌리 깊은 전통 속에서 니체는 종교를 통한 구원, 이성을 통한 진보의 가치를 부정했다.
수천 년의 명맥을 이어가던 전통적 사고방식이 니체로 인해 박살나면서, 시대는 본격적으로 현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절대적 중심 가치는 더 이상 현대에서 유효하지 않았다. 반대로 기존의 중심적인 가치가 의문시되고, 그 동안 외면 받았던 가치들에 관심이 분산되는 탈중심(Decentering)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른바 우리에게 익숙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니체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현재까지도 니체 철학은 분야를 막론하고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중이다. 감성과 창조성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니체 철학은 많은 사람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하고 있다. 철학은 물론 문학, 미술 등의 예술도 니체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다. 경제나 경영, 행정을 포함한 실용적인 분야에서도 니체의 사상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얼마 전부터 아모르 파티(Amor Fati),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고 있다.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흥청망청 유흥을 즐기라는 소비적인 뉘앙스로 곡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의하면 운명을 사랑하고 현재에 충실한 태도는 방탕한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성적, 취직, 재산과 같이 미래지향적이고 목표지향적인 가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말고 나만의 기준에 맞는 가치를 추구하라는 말이다. 자신만의 가치에 따라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 때 우리는 아모르 파티, 카르페 디엠의 진정한 의미에 닿을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하는 삶은 즐겁다. 당위성이라는 의무감과 그에 따른 부담감의 고삐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은 사람의 발걸음은 가볍다. 즐거움에 대한 죄책감은 불필요한 것이고 더 나아가 나의 의지를 갉아먹는 해충이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결정해버리는 외부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허락해도 된다.
니체는 이성과 법칙의 신 아폴론 대신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찬양한다. 술은 향유자를 도취하게 만든다. 술에 취하듯 현재에 도취하는 삶. 이러한 삶에서 광기로 여겨질 정도의 창조성이 발휘된다. 자신이 창조한 새로운 가치로 인생을 채울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이제라도 다 같이 삶의 즐거움을 위해 건배하자!
니체는 1844년 독일 뢰켄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어릴 때부터 종교, 라틴어, 그리스어, 음악에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다. 그의 가정에서 할머니의 위압적인 모습은 어머니의 불안정을 초래했고, 이것이 곧 니체의 불안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창조적이면서 불안정한 상태는 니체를 힘과 강인함에 대한 동경에 빠지게 한다. 그는 청소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고전어, 문학, 음악에 매진해 재능을 키워나간다. 20세에는 본 대학에 진학하고, 이후 스승인 문헌학자 리츨(Friedrich Wilhelm Ritschl)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학한다. 이때부터 그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철학에 매료됨과 동시에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와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본 대학,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니체는 만성적 두통과 위장장애로 건강이 악화되어 35세에 교수직을 사임한다. 이후 저술 활동에 집중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학』 등 수많은 책을 남긴다. 더더욱 건강이 악화된 니체는 말년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다가 1900년에 죽음을 맞이한다.
※ 추천도서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