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교환일기 제 5편 - 영에게
영에게
영! 오랜만이야. 답장이 좀 늦었지?
그 사이 찐득한 더위가 찾아오고, 빙수를 저절로 찾게 되는 계절이 되어버렸어.
나는 ’팥‘이 들어간 빙수는 선호하지 않아. 그런데 엊그제 푹푹 찌는 더위에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데 그 순간 시원한 팥빙수가 떠오르는거야. 팥이랑 얼음을 숟가락 위에 얹어 그 위에 하얀 떡 하나를 올려 입에 넣는 상상.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 않아? 분명 팥빙수는 내 취향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취향도 계절을 타고 흐르나봐.
지난 편지에서 영은 ‘행복도 언젠간 지나간다는 걸 몰랐다고, 행복을 잃을까봐 걱정이 된다’고 했지. 행복은 민들레 홀씨처럼 우연히 내려앉았다가 또 그렇게 사라지는 것 같아. 언젠가는 우리를 힘들게 할 일들이 예고 없이 찾아오겠지. 그래서 난 더더욱 오늘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팥빙수에 박힌 조그만 떡을 찾으면서. 더위에 뻘뻘 땀을 흘리다 별안간 머리칼 사이를 스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행복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고 싶어.
그런데, 행복의 틈새로 갑자기 불길한 징조가 끼어들었어. 너무도 평범한 징조.
여느날처럼 대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말실수가 툭, 하고 튀어나왔어. 그런 거 있잖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엉뚱한 단어가 불쑥 끼어드는 식으로. 이를테면 롯데월드를 롯데리아라고 한다던지, 스타벅스를 스타필드라고 한다던지. 작고 사소한 말실수들. 웃어넘길 수도 있는 그런 일들이었어.
하지만 그런 말실수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더라고.
이뿐만이 아니야. 요새 들어 연예인 이름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기도 하고, 좋아하던 드라마 제목조차 잘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어. ‘요새는 젊은 사람도 치매에 걸린다는데, 나에게도 혹시 그런 전조증상이 나타나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불쑥 올라왔고, 불안이 어느새 마음 한 구석에 쌓이기 시작했어.
지금 내 머릿속 상태를 표현하자면, 새벽에 텔레비전을 켰을 때 나오는 노이즈가 가득한 화면같아. 모든 게 뒤섞인 채로 붕 떠 있고, 오래된 물처럼 고여서 끈적끈적해진 느낌.
나의 생각이 정확한 진단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내 머릿속이 이렇게 흐릿해진 데에는 핸드폰의 영향이 꽤 크다고 생각해.
너무 많은 시간을 작은 화면 속에 쏟아붓다 보니, 머릿 속에 저장해야 할 것들이 줄줄 새어나가는 기분이야. 예전에도 영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지. 그땐 이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됐어.
지금 이대로 가다간 10년도 채 되지 않아 내 머리가 돌처럼 딱딱해져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거 있지. 글을 쓸 때는 그런 불안함이 티나지 않아. 단어를 잘못 선택하면 지우고 다시 쓰면 되니까.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할 때 자꾸 어버버거리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자꾸 작아져.
고단한 하루가 끝나면, 그 어떤 것도 집중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버려. 그럴 땐 가장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게 핸드폰이더라. 손에 쥐고, 그 안의 세계를 별 생각없이 유영하는 거지. 화면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멍한 상태로 잠이 드는 날이 많았어.
화장실을 갈 때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도 그 짧은 정적조차 견디지 못해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 이런 의존이 결국 내 말과 행동으로 표출이 되니 이제야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에 다다랐어.
요새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애쓰고 있어. 내 자유시간을 가득 채우기보다 빈칸으로 남겨두기 위해 노력 중이야.
그랬더니 양 손으로 시간을 주욱 늘린 것처럼 두 배, 세 배로 늘어났어. 늘어난 빈칸을 자꾸만 채우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맑고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어. 마음에 창을 달아 활짝 열어두듯, 자유롭게 생각하고 깊이 사유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어. 그런데 무심코 핸드폰을 드는 순간마다 내 마음의 창의 크기가 자꾸만 작아지는게 느껴졌어.
우리의 뇌는 자주 쓰는 회로는 강화하고, 쓰지 않는 회로는 소멸시킨다고 하더라. 아마 내 뇌에서는 ‘깊이 사고하는 회로’가 조용히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도 다행인 건, 뇌의 가소성 덕분에 행동의 변화가 이어지면 새로운 회로도 다시 만들어진다는 점이야.
우선, 걸을 때 손에 쥐고 다니던 핸드폰을 이젠 가방 안에 넣고 다니기로 다짐했어. 처음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게 어색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스치는 느낌이 생각보다 좋았어. 화면에 고정되었던 시선에서 벗어나자 주변의 것들도 더 선명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결국 핸드폰과 멀어지는 건 내 행복과는 가까워지는 길이겠지. 지금은 조금 낯설고 버거워 보여도, 언젠가는 두 손을 가볍게 흔들며 걷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날이 오기를.
무더운 여름 한가운데서,
영만의 작고 분명한 행복을 발견하길 바라.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