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한 달 살기 4주차
이번에는 내가 일하는 곳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나는 밴프 다운타운에 위치한 파크 디스틸러리라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푸드 러너'라고 불린다. 하루에도 몇백명의 손님이 오는 이곳에서 서버들이 모든 음식을 나를 수 없으니 그 역할을 푸드 러너가 대신 해준다. 키친과 서버, 엑스포와 소통해야 하고 손님들도 푸드 러너에게 무언가 요청할 때가 있어서 영어는 기본적으로 잘 해야 한다. 나는 처음부터 캐나다에 있는 기간인 5주만 일하는 것으로 약속하고 들어왔다. 짧게 워홀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여름에는 성수기라 짧게라도 일하는 걸 반기는 분위기다. 그리고 푸드 러너는 사실 별로 교육할 것도 없어서 쉬운 일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딱이다. 상대적으로 손님이 적은 해피 아워에는 직원들이랑 수다 떨거나 뭘 간단히 먹기도 한다.
이곳에 온 후로 사소한 친절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그 예시 중 하나는 눈인사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내가 신기하게 생겨서 쳐다보는 줄 알았다. 음식을 가져다 줄 때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꼭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고, 눈을 바라보며 인사하는 게 여기 문화였을 뿐이다. 한국에서 커피숍, 편의점 등등 다양한 알바를 하며 꼭 인사는 했지만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인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초반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는데 적응되고 나니까 눈을 바라보며 인사하는 게 고마운 마음이 더 잘 전달된다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음식을 갖다준 것 뿐인데, 사소한 것에 성의를 담아 마음을 전달한다. 작은 노력을 들여 서로 기분 좋은 일을 만드는 것이다. 사소한 친절은 놀랍도록 큰 기쁨을 가져다주곤 한다.
파크 직원들도 정말 다들 특이하다. 키친이 아닌 프론트에 있는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특이하다는 말은 센 단어일 수도 있으니 다시 말하자면 외향적이고 각자 개성이 강하다. 프랑스에서 온 파비앙은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에서 나체로 자전거를 타고 있다. 필리핀에서 온 탬은 성별을 알 수 없고, 호주에서 온 베일리는 키가 200cm라 내 말을 잘 듣지 못한다. 아일랜드에서 온 잭은 일하면서 꼭 우유를 마시고, 인도에서 온 캐시는 5개국어를 한다는데 그 중 인사만 할 줄 아는 게 3개인 것 같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엑스포이자 내 트레이너였던 루크는 호주에서 왔다. 호주 억양 때문에 왠지 꼬부랑거리는 것 같은 영어가 가끔은 안 들려서 동문서답을 할 때도 있는데 단 한번도 지적하거나 민망하게 한 적 없다. "does it look okay?"를 못 알아들어서 "oatmeal?"이런 적도 있다. 호주 남자들은 다 머리를 길게 길러? 이런 엉뚱한 질문도 잘 받아준다. 한 번은 꽉 찬 식당에서 스테이크 세 그릇을 들고 가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음식을 다 엎었는데 내가 속상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게 달래주고 하이파이브도 해줬다. 이 날 실수한 내게 다들 과한 친절을 베풀어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아무튼 루크는 진짜 따뜻하고 착한 파크 공식 삼촌이다.
제일 좋아하는 푸드 러너는 레이먼드다. 16살 레이먼드는 밴프 출생, 중국계 캐내디언이다. 엄마에게 빚진 컴퓨터값과 2년 후 일본 여행을 위해 어린데도 제일 열심히 일하는 친구다. 얼마 전에는 혼자 숫자를 중얼거리길래 뭘 그렇게 중얼거리냐 물었더니 2027년에 20살이 된다며 의기양양해했다. 이 어린노무시키가 자꾸 본인이 늙었다고 할 때마다 머리를 콩 쥐어박고 싶다. 어느 날은 레이먼드에게 캐나다의 10대들은 뭐하고 노냐고 물었다. 그러자 쿨한 백인 애들이 뭐하고 노는지는 모르겠는데 자기는 별 거 안한다고 한다. 그래서 쿨한 백인 10대들은 뭐하고 노느냐고 물었더니 뭐 하는진 모르겠지만 항상 화장실을 점거하고 있다고 한다. 이게 왜 이렇게 웃겼는지 모른다. 빨리 18살이 되어 도시로 나가고, 중국에서도 살아보고 싶다는 레이먼드가 잘 컸으면 한다. 이모의 마음이다.
이 외에도 항상 외국식 리액션으로 날 반겨주는 테사, 매번 옷 예쁘다고 해주는 피아, 좋은 하루 보내라고 말 해주는 질리안, 책 취향이 나랑 비슷한 써니, 밥 먹으라고 꼭 챙겨주는 말존 등등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일하는 게 그리울 것 같지는 않다. 케첩 리필할 때마다 주변에 날라다니는 날파리 때문에 통을 5번씩 쳐야하는 일이라던가, 한 번에 세 그릇을 들 때 욱신거리던 손가락 느낌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항상 반갑게 인사하던 사람들은 조금 궁금할 것 같다. 살면서 한번이라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인연들이지만 기억 속에는 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