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줄도 모르고 살았다.
과도하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삶을 살았다.
이게 임계치가 넘어버렸다.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문제는 '과도하게'라는 것이다. 수용의 의미를 잘 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균형의 실패일 수도 있겠다.
나는 없고 다른 사람만 남은 것이니 나는 가루가 되던가 속병 화병이 생겼다. 이기적으로 세팅된 인간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데로 산다.
아주 얄밉고 꼴사납다.
나는 그것을 수용하는 척했다. 그것은 '척'이지 수용이 아니다.
결국은 내가 앞뒤가 다른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수용하고 뒤에서는 꼴도 보기 싫어하니 말이다.
좋은 사람처럼 사는 게 장점이 뭘까?
사람들이 잘해준다, 친해진다, 나를 좋아해 준다. 최소한 미움에서는 벗어난다.
장점이 많으니 나는 오랫동안 내가 '척'하는 줄도 모르고 이 방법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과한 수용을 해주니 말이다. 상대는 그게 옳은 줄 알고 더 날뛰는 것이다. 그것을 간과한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생각해 보니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인정욕구가 갈급하니 그것에 초점을 맞춘 인간관계를 한 것이다. 웬만하면 두루두루 잘 지낸 것 같다.
그런데 살아보니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수용해 줘도 내 마음만 상처받고 아플 뿐 그들은 편하게 산다. 그리고 결코 나를 인정하거나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잠시 좋아하는 척할 뿐이다.
그걸 알고 나니 말이다.
나는 이제 할 말을 하기로 했다. 아주 꼴 사나운 그들의 행태를 말이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다.
말하기 전과 후에도 어차피 그들의 관점은 변하지 않는다. 최소한 내 속이라도 시원하고 나의 불편함을 인지 시켰으니 성공이다.
아예 상대방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쫌생이 이기적인 인간들을 수용하는 나의 에너지를 아끼기로 했다.
안과 밖이 다른 나를 되도록 엇비슷하게 만들려고 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냥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