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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Oct 31. 2020

평범한 모란디의 정물이 특별한 이유

평범한 것 (모란디의 병)

Edgewater 집 앞 카페, 왠지 모란디가 생각나서


평범한 것의 기품


어쩌면 화가는 사물을 실제보다 깊고 유려하게 바라보는 인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혹은 남들이 바라보지 않거나 관심받지 못해 가치가 떨어진 것 소외당한 것들에 괜스레 마음이 쏠리고 그것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 이랄까? (심폐소생술이 따로 없다)


타인을 정밀하게 그려본 사람은 안다.

그것을 그릴 때 내가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것도 아주 자세히 그리고 자주 바라보았다고 장담하는 것들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사실은 보지 못하였는지를.

손등 위의 털, 그것도 어느 불특정 한가닥의 털끝 이라던가 홍채의 다채로운 무늬 혹은 인중 사이의 그림자의 각도 볼 어딘가의 다른 땀구멍보다 미세하게 큰 어느 구멍 하나, 등. 각각을 각각으로 개체를 본연으로 가치 있게 그리고 섬세하게 바라봐 주는 자상함. 그것을 그려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런 섬세한 자상함에 홀딱 반해버린다.


누군가를 정성 들여 그리고 나면 비로소 나는 그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 집힌다.

예컨대 너의 깊이 파인 인중의 각도와 볼 언저리의 땀구멍까지 그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 그런 것에 애정이 붙은 다음에야 진짜로 대상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집 앞 자주 가던 카페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정물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어제도 그제도 늘 그 자리에 무의미하게 놓여있던 그것을 자세히 들어다 본다.

그것의 질감과 색과 모양 그리고 빛이 반사되는 지점과 라인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보던 순간 흡사 나는 모란디가 된 것만 같다.





조르조 모란디.

그는 거의 평생을 특별한 것 없는 정물을 그리며 그의 골방에서 살았다.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낡고 평범한 화병이나 물병 혹은 찻잔 등을 그리고 또 그렸다. 오직 물을 담거나 차를 담는 곳에 쓰였다가 그마저도 낡고 오래돼 버려진 물병들은 그의 눈과 손과 마음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고 특별해졌다.


삶에 지친 노동자의 가정에서 이가 나가도록 바쁘게 쓰이다가 버려진 병에 집착했던 모란디. 그는 얼마나 많고 무수한 날들을 오직 용도가 아닌 형태로만 남아버린 그것들에게 마음을 준 것일까. 그는 왜 그런 흔하고 평범한 물병을 가져다 시간을 입히고 세월을 얹어야만 했던 것일까.


자세히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해 오래 그 흔해 빠진 정물들을 바라보며 그는 어쩌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던 특별함을 찾아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평범한 물건에도 세월과 시간과 사연이 켜켜이 쌓이면 짐짓 그것에 품격이 생기고 기품이 들어 난다는걸 알고 있었는지도.


너무나 바쁘고 빠르고 필요에 의해서만 시간을 써야 하는 요즘 사람들. 그렇게 세상의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림을 권하고 싶다.

터치 한 번으로 순간과 일상을 모두 기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다해 바라본 사물과 사람과 시간이야말로 진짜 내가 온전히 소유하고 사랑하고 관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란디의 보잘것없는 낡은 병이 그토록 오래오래 에너지를 갖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것을 그리는 동안 그 크게 복잡하지도 않은 사물의 옆면과 측면과 윗면과 빛을 받는 지점, 늘어진 그림자 하다못해 위에 얹어진 세월의 흔적, 먼지까지도 온 마음과 집중을 다해 바라봐 주었기 때문이다.


쓸모없고 평범한 것에 다정한 마음과 관심 어린 시선이 오래 머물면 그 흔한 물건에도 비로소 품위라는 것이 생긴다.


그저 그런 나의 일상을 관심 있고 면밀하게 들여다 봐주는 이가 있다면 그때 나는 그에게로부터 특별해진다. 이처럼 내가 쓸모없고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낄 때 나의 오른쪽과 왼쪽과 앞면과 후면과 속과 밖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으로부터 보잘것없게 느껴졌던 나도 작품처럼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그림으로 그리는 행위는 단순하고 잔꾀를 부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무리 단순화된 선으로 표현한다 해도 대상을 유심하고 고심하게 관찰해야만 한다.

그것은 외관을 뚫고 들어가 내부까지도 침투하게 되는 놀라운 과정이다.


우리는 모두 화가가 되어야만 한다.

김대리와 이과장등으로 불리는 사회 안에서 누군가 한 명쯤은 화가의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봐 주는 이가 필요한 건 아닐까. 그림을 그리고 선 하나에 시간을 할애하는 깊고 느린 과정은 평범한 물건 혹은 타인을 기품 있고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행위일 뿐 아니라 나에게도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 사소하지만 보이지 않는 나와 너와 우리들의 면면을 우리는 매 순간 놓치고 만다. 그림을 그릴 때처럼 타인을 예민하고 유려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삶이 풍요롭다.


모란디는 애써 많은 것을 경험하지 않았다. 자칫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열정과 물질을 관통하는 능력에 때가 묻을까 조심스러웠다. 그는 단지 평범하고 단순한 물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채로운 아름다움과 세상까지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순간의 쾌락을 위해 무수히 스치는 오락적 파편들이 아니라도 무언가를 주의 깊고 예민하게 바라보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단순한 찻잔 하나 안에서도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평범한 물건에서 다채로운 면면들이 드러날 때, 그것은 그저 흔해빠진 대리나 과장으로부터 벗어나 내가 되는 특별한 순간이고 평범하고 낡은 찻잔이 작품이 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어쩌면 터치 한 번으로 사진을 찍고 저장을 하는 것으로도 족한 일을 시간과 정성을 쏟아 그림으로 그리고 기억하고 간직하라는 말은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방법 일 수 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법을 관통하지 않고서야 결코 이룰 수 없는 것들의 힘을 알고 있다.

이를테면 평범하고 낡은 모란디의 정물이 특별해지는 순간처럼 말이다.

화가의 눈이 없었다면 결코 특별해질 수 없는 그저 그런 존재. 그리고 그저 그런 평범한 물건을 아름답고 기품 있게 만들어 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힘 말이다.


우리는 모두 화가가 되어야만 한다. 타인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My Old Drawings



15년도 넘은 나의 어린 시절 미흡했던 드로잉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섬세한 선들과 디테일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시간과 과정이 들어간 일은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고 오래 그리고 깊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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