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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May 28. 2020

길바닥에 만연한 예술

버려진 것 (박현기의 텔레비전)

Everything has beauty, but not everyone sees it



버려진 것의 재탄생


격하게 비바람이 몰아 쳤다.


어릴 때 나는 비를 싫어했다. 사실 지금도 나는 비가 싫다. 무더위에도 해가 바스러지듯 쨍한 날씨만 고집해 좋아했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매일 그런 날씨만 골라 살 순 없다. 날씨는 숫자가 적힌 종이조각을 지불하고 바꿔먹는 아이스크림이 아닌 것이다. 원치 않는 사람과도 관계는 관계이듯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필연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비와도 되려 관계를 맺어야 했다. 미국에 살면서 그 관계와의 원활은 절실했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오면 외출을 삼가고 불필요한 액티비티는 줄인다, 로 합의를 본 듯 도무지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 무언가 억울하다. 내 하루를 비에 빼앗기는 것 같아 분했다. 그것도 좋아하는 것이 아닌 싫어하는 것 때문에.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 보니 내 하루를 비에 빼앗기는 기분의 원인이 바로 '내가' 비를 싫어해서가 아닌가. 이쯤에 생각이 흘러 고이니 아차 싶다. 이 모든 악순환의 원인이 바로 '나' 라니 채찍으로 등짝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비를 (좋아까진 아니더라도) 대강 무시하자. 그리고 내갈길 가면 그만이다, 하고는 비를 뚫고 걷는다. 일단 걸어 본다.


그런데 의외로 기분이 상쾌하다.

대기에 흩뿌리는 물방울들을 마다하지 않고 다정히 맞았다. 해가 뜨면 어차피 말라버릴 자연의 한 부분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나름 운치도 있다. 허벅지가 눅눅하고 높은 숫자가 적힌 종잇조각과 맞바꾼 파카에 물이 맺혔지만 나는 자연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는 생각에 기분이 상쾌해진다.

흡사 유려한 모양으로 자라난 식물이 된 것 같다.


비를 맞고 들어와 따듯한 음료를 마신다. 해가 쨍한 날 걷고 들어와 마시는 차보다 만족의 강도가 세다. 이런 반전은 몰랐는걸, 따듯한 음료를 홀짝이며 비와의 화해에 조촐한 자축을 한다.



비 내리는 길을 걷다 발견한 깨진 텔레비전이 내 비전에 입력되는 순간 뇌는 바로 백남준 선생님을 출력해낸다. (교육의 폐해 혹은 효용) 무수한 타인들은 이 길목을 지나다 버려진, 한때는 누군가에게 최상의 기쁨이었을 기능을 상실한 물건 앞에서 무슨 생각들을 떠올렸을까, 문득 궁금했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날렵하게 밖을 걷던 처녀가 뜬금없이 발길을 멈추고 버려진 쓰레기를 찍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그 사람은 또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까? 아마 나를 (미쳤나 하여) 쳐다보는 이는 있어도 이 무수한 사연과 추억을 품고 생을 마감한 텔레비전에 애정 어린 관심을 주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더 다정한 마음으로 오래 바라보아 주었다. 너는 오랫동안 수고했으니.


비 오는 겨울 오후 길가에 전시된 (오직 나만을 위한) 설치미술.

모두가 무심히 지나치던 의미 없는 무엇에 어느 누군가가 발길을 멈추고 관심을 비추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 바로 그 순간. 그 의미 없던 것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에 바로 이야기와 예술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하면 으레 김춘수 선생님의 꽃이 떠오를 법도 하다.


비 오는 날 걸음을 걷다가 함부로 버려진 텔레비전 앞에 이르러 설치미술에서 시까지 훑었다.

이만하면 예술은 길바닥에 달라붙은 씹다 버린 껌만큼 평범하고 가까우며 만연한 것이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어느 비 오는 날, 하늘에 떠 있는 태양 혹은 산책로를 걸을 자유 같은 것, 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의미 없는 무엇에 의미를 부여해 생을 선물하는 사람. 어느 불특정 다수 안의 특별한 한 사람. 어쩌면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을 품었다 갑자기 세상에 잉태하는 사람. 생, 삶과 살아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사람. 누군가 쓸모없이 여기는 것에 아름다움과 생을 부여하는 사람. 기괴한 예술가. 바로 재미있는 사람.

(김춘수 선생님이 길가에 의미 없이 핀 들꽃에 일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같은 것)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비를 싫어하며 부정하던 내가 마음을 고쳐먹고 화해를 청하니 의외의 호사를 누리게 보답을 해준다. 

무수한 일상의 나열들 속 오늘은 버려진 물건, 미술과 시 이런 것들이 비와 얼버무려진 시간이었다.








Hyunki Park / Untitled 1978



New York. The Armory Show 2018



길바닥에 버려진 쓰레기(텔레비전)를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백남준 작가님) 박현기 작가님의 미디어 아트 설치작품.

순수하고 따듯한 눈과 마음을 갖은 누군가로 인해 쓰레기도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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