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지윤 May 28. 2020

생화라 불리는 죽은 꽃과 하루키의 덴고

생을 다한 것 (하루키의 덴고)

Andrew Kreps Gallery NYC / Marc Camille Chaimowicz. Tulip Vase & Paper Bouquet 2017.



생을 다했으나 아름다운


요즘 사람들이 내게 자꾸 식물을 건넨다.

아이를 안아보지 않은 처녀가 마치 신생아라도 받아 든 것처럼 나는 그것들을 어찌할 줄 잘 몰라 허둥댄다.


사람들이 흔히 플라스틱으로 흉내를 낸 꽃이 아닌 것을 '생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뿌리와 단절된 꽃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 (혹은 죽음 그 자체) 일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꽃'이 아닌 것이다. 그걸 무어라 부르는 것 같았는데 기억나질 않는다.


읽지 않으려던 하루키 아저씨의 1Q84를 언젠가 읽고 말았다. 아주 우연한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은 읽지 않았을 것이다.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느 순간부터 하루키 아저씨와는 좀 맞지 않음을 이해했다. 미워서가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식하고 헤어진 연인처럼 이제는 멀어진 이 아저씨의 이야기를 일부러 찾아 읽지 않는다. 그저 예의상 읽고 있을 뿐이다. 헤어진 옛 애인의 안부처럼.

우연한 사건이 없었다면 쌓여있는 책 더미 속에서 옛 애인과 같은 그의 이야기에 시간을 할애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우연은 나를 이기고 말았다.


그곳에 나오는 덴고의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리와 단절된, 생화라고 잘못 불리고 있는 이미 죽어버린 꽃, 말이다.


귀를 가져다 대어 보지 않고는 확인할 수 없는 생사의 여부. 덴고는 의식이 없어도 하염없이 자라나는 수염, 신체의 일부를 다듬어 내는 간호사를 보고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가늠해 보는 듯했다. 의사는 그가 죽음으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생의 의지를 상실한 상태는 다시 삶으로 돌아설 수 없다. 아직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흡사 생화라고 불리지만 뿌리에서 잘려나간 꽃 같았다. 삶과 분리된 그와 뿌리와 단절된 꽃, 그 둘에겐 더 이상 삶 쪽에 속하는 미래란 없는 것이다.


-링거액이 몸 안으로 들어가고, 카테터가 소량의 배설물을 밖으로 실어낸다.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 그런 완만하고 조용한 투입과 배출뿐이다-


우리가 실로 아름답다 생각하는 뿌리와 단절된 꽃은 이미 생명과 분리되어 삶 쪽이 아닌 죽음으로 가는 미래만 있을 뿐이다.

아주 천천히 봉오리가 피었다가 급히 시들어버리는, 마치 코앞에 귀를 가져다 대야만 생사의 여부를 확일할 수 있는 덴고의 아버지처럼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과 과정으로 마지막을 알리며 말라죽어가는 꽃.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 아름다운 꽃이 가련했다.

꽃을 받고 행복해하는 사람들. 꽃의 죽음에는 무감한 사람들. 어쩌면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잔인한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고통과는 무관한 사람들.


나는 어릴 때부터 꽃보다는 뿌리가 박힌 식물을 좋아했다. 오늘에 와 생각해 보니 어린 마음에도 꽃이 죽어가고 있는걸 가엽고 불쌍하게 여겼으리라.

그러나 뿌리가 있는 식물인들 내가 얼마나 잘 돌볼 수 있을까. 마치 생전 아이를 안아본 적 없는 처녀 같은 몸짓으로 서툴고 허망하게, 뿌리와 단절된 꽃보다도 빠르게 죽여버릴지도 모를 일이지.

죽어가는 꽃을 좋아하는 여자와 살아있는 식물을 죽여버리는 여자. 그중 어느 쪽이 더 잔인한 인간인지 도통 가늠이 서지 않았다.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대지를 뚫고 나와 자라난 식물은 꽃으로 절정을 맞이한다. 우리가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삶에 찾아오는 절정과도 같은 순간을 맞이 했을 때 우리는 꽃을 선물한다. 너의 노고와 시간이 드디어 만개했음을 축하해 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봉오리를 맺고 피어오르는 꽃에게도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서툴지만 다정한 손길로 그것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처음 받아 안아 보는 아기 에게도 모성이 피어오르듯 죽어가는 꽃 에게 정성을 다해.


그리고,

결국 하루키 아저씨와는 합의를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어 헤어진 연인이 그렇듯 서로의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관계를 회복해 보겠다는 애달픈 '노력'은 시간의 '낭비'로 귀결된다는 걸 절감했을 뿐이다.

이 단편으로도 족했을 이야기를 3권으로 늘어뜨린 아저씨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나는 앞으로도 그의 이야기를 가끔은 읽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진 연인의 안부를 묻듯 그를 궁금해하는 심정으로, 그렇지만 더 이상의 애정은 남아있지 않다는 확신으로.

1Q84는 나에게 그와의 관계에서 그런 확신을 준 해프닝이었다.

한때는 애정 했던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그의 소설들 그리고 이제는 차게 식어버린 마음으로 가끔 예의상 보게 될 그의 이야기들.


나는 그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싶었다.

어쩌면 1Q84를 기점으로 우리의 관계는 만개하였으니, 이제 죽어감을 알라는 아름답게 만개한 꽃다발을.


어쩌면 꽃은 끝과 이별과 허망함이 더 잘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Andrew Kreps Gallery NYC / Marc Camille Chaimowicz. Tulip vase & Paper Bouquet 2017.


종이로 만들어진 꽃다발이 이미 뿌리와 단절되어 죽어가는 생화보다 덜 가치있고 덜 아름다울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오래도록 시들지 않고 썩어버리지 않는 종이 꽃이야 말로 진짜 살아있는것은 아닐까.



Trader Joe's



Whole Foods



마트에서 장을 보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꽃을 한아름씩 산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당신에게 기쁨과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예쁜 꽃은 당신에게 안기기 위해 절정의 시절에 뿌리와 단절되어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애써 피어난 꽃에게도 위로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이전 05화 이우환 선생님의 돌덩이와 나의 돌멩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