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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May 11. 2022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에 대한 질문의 답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나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어요', 혹은 '쓰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어요' 따위의 다소 모호하고 피상적인 대답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말을 더 보태어 보라고 해도 저 미스터리하고 불분명한 문장 보다 내가 글을 쓰고 앉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보다 더 잘 설명할 길도 딱히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쓰는가, 도대체 왜.


도무지 구체화될 수 없는 그 이유를 나는 이미 내가 가고자 하는 혹은 갈 수밖에 없는 길을 미리 걸었던 몇몇 작가의 '말' 속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토니오 크뢰거라는 인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내가 처음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꽤나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 하다. 토니오 크뢰거는 1900년 초, 한 세기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토마스 만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다시 한 세기가 지난 2000년이 된 시점에 그의 이야기를 접했고 그 이야기를 읽는 내내 혹시 그때의 토니오가 나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을 정도로 그 백 년 전 한 인간이 했던 생각과 고민을 지금 내가 여기 앉아하고 있다는 것에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품 속 토니오는 자신의 연인 리자베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 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한테서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또한, 나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허깨비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은 부디 마법을 걸어 기들을 풀어달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허깨비 들과 우스꽝스러운 허깨비들, 그리고 비극적인 동시에 우스꽝 스러운 허깨비들인데, 나는 이것들에게 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조지 오웰은 토마스 만을 통해 토니오가 세상에 나오고 반세기 정도가 지날 무렵 자신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런 말을 한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수년 전부터 나를 채근하는 무언가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고집이 센 조카가 갖고 싶은걸 얻기 위해 울며 달라붙는 끈덕짐이었고 젖을 주지 않는 엄마를 향한 아이의 본능적인 악다구니 같은 것이었다. 되려 더 끔찍한 것은 위의 상황이라면 그저 도망을 쳐 버리거나 달아나 버리면 그만인데 나를 채근하는 그 울부짖음은 불행하게도 (아니면 다행스럽게도) 내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언젠가는 그것들을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한다는 운명적 사실을 자각한 순간이 있었다. 토니오처럼.

그것들은 토니오가 말하는 형체 없는 허깨비들이었고 오웰이 말하는 나를 끌고 가는 거역 없는 귀신이었다.


그 허깨비와 귀신같은 존재들이 자꾸 나타나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자신을 꺼내 달라고 내면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어쩌면 써야지가 아니라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내게 '글'이란 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내가 선택된 것,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때쯤 부터 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고 나왔듯 그들에게도 적당한 때가 있을 거라고 게으름과 두려움을 진중함으로 위장한 채 글쓰기를 미루며 그들을 그리고 나를 속이고 타일렀다. 미숙하게 나온 아이를 돌보는 일만큼 위험하고 어려운 일도 없지 않은가. 내 게으름은 그들을 예정일이 지나도 나오지 못한 태아가 되어 만삭의 산모에게 고통과 불편함 그리고괴로움을 주는 존재가 되어 갔다. 미루고 외면할수록 그것들은 무섭게 몸집을 키워 나갔다.


이렇듯 작가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필연적으로 세상에 나와야만 한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잉태되어 한 인간의 몸속으로 부터 나와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이루듯 당신이 당신의 부모로부터 이 세상에 빠져나와 겹겹의 사연을 쌓아가듯 그들에게도 각자의 삶을 살 권리가 작가로부터 생겨난다. 그들도 세상에 작품이 되어 나오기 전까지는 작가를 통해 이 세계에 나오고자 발악을 하는 태아였고 작가는 그 매개였다.


주인공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자라났다.


그렇게 임신을 한 어미가 운명을 거부하고 낙태하지 않는 이상 그 인물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이 세계에 나오고야 만다. 나처럼 당신처럼 그리고 우리처럼.


이렇듯 작가를 통해 잉태되어 결국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인물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햄릿을 알고 돈키호테를 알고 게츠비를 안다. 그 인물들은 우리가 살면서 만났던, 잠시 스쳤거나 오래 머물렀던 어떤 인물보다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각자의 성격과 사연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내 절친의 사랑 이야기만큼이나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입시를 하던 시절 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기독교인이 성경을 끼고 다니듯 했던 적이 있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적재적소에 내가 원하는 이야기와 충고를 건네는 듯했다. 그 시절 그 주인공 들은 지구 상 어느 심리상담가 보다도 도움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시점, 가상세계와 메타버스와 아바타의 세상이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문학과 그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햄릿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SNS 속 팔로워와 다른 점은 그는 절대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라는 말은 틀렸다. 내가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현실 세계에 태어난 각각의 인간이 소명 혹은 재능 따위를 하나씩 부여받았다는 가정 하에 글을 쓰는 의무를 부여받은 인간들 에게는 필시 세상에 나오고자 하는 어느 사연 많은 주인공을 세상에 내놓아야만 하는 필연적이고 숙명적인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글쓰기란 원해서가 아니라 그저 운명적으로 그 외롭고 지난하고 고달픈 작업을 묵묵히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일, 그리고 그 작가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덧붙여 나는 왜 쓰는가에서 조지 오월은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를 크게 네 가지로 요약했다.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이 그것인데,


앞서 말했던 토니오 크뢰거에서 토니오자신이 (소설)을 써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했을 무렵부터 그런 자신을 부정하며 금발과 푸른 눈을 한 생동하는 밝은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에 속해 보려고 하지만 그럴 수록 그는 자신이 그들과 매우 다름을 더욱 깊게 인식하고 좌절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자신이 속한 세계의 사람을 매우 혐오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고백은 그가 동경하는 세상의 반대편, 바로 자신이 혐오하는 부류에 속한 자신의 다름을 경멸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자기 혐오의 이면에는 그가 그들과 다른 자신을 구분짓는 걸로 스스로를 과시하고 그것을 통해 교묘하게 자신이 우월한 존재임을 들어내 되려 그들의 밝고 천진난만 하기만 한 삶을 무시하고 경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웰이 말했던 글쓰기의 동기중 첫 번째 동기인 순전한 이기심에서 그는 그것이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작가가 타인에게 예속되지 못한 채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고 하는 부류이며 그런 욕구는 최상층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동통 되는 특성, 이라고 말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에는 사실상 그런 것이 강하게 깔려 있다. 내 경험과 생각과 가치관과 지식을 종내 세상에 들어내고 나누고자 하는 작업이 바로 글 쓰기이고 그것이 책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그 글과 관련된 다수의 사람들 (독자와 편집자와 출판사 관계자와 비평가와, 등등) 중 그 이야기를 글로 써 기록을 남긴 인간만이 (이것은 그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도 포함된다) 그 다수 속 유일한 한 사람, 바로 작가가 된다는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진지한 작가들이 대체로 언론인에 비해 돈에는 관심이 적어도 더 허영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오웰의 말은 다소 거북스럽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토니오와 나와 (글을 쓰는 모든) 당신들은 사실 이기적인 나르시시스트인 것이다. 단 한 사람이 쓴 단 한 권의 책을 수세기에 걸쳐 읽어 주는 독자로 인해 단박에 단 한 사람의 작가와 수많은 독자로 위치가 분리 된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그것을 읽는 다수의 독자 앞에서 그 글을 쓴 한 인간이 우월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라는 다소 오웰적 순전한 이기심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미학적 열정이다.


사실 글쓰기라는 것은 단지 한 가지 이상의 언어를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어디에든 쓰고 쳐서 기록하는 모든 문서를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의 종류를 파악하고 나눠보고자 한다면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는데 보도 자료나 보고서 혹은 계약서와 일상의 메모까지도 모두 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순수 창작물 (시와 소설과 에세이나 극작 그리고 일기까지도)을 쓰는 작가에게 필요한 절대적 욕구가 바로 이 미학적 욕구가 아닌가 싶다.


나는 가끔 글을 쓰는 일을 레고 블록을 맞추는 일 따위로 비교하고는 하는데 만약 우리가 만 피스의 레고 블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 난잡하게 어지러진 블록 하나하나를 정리할 목적으로 쌓아 올린다고 가정 했을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크기나 색깔별로 쌓아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저 정리의 목적으로 손에 잡히는 데로 쌓아 올릴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부류는 그것을 헤집고 고르고 들어보고 올려보고 다시 부수고 다시 헤집기를 반복하며 블록을 '골라' 가며 쌓는 부류가 있을 것이다. 그 세 번째 부류가 바로 순수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작가가 속한 부류가 될 것이다.


내용과 핵심이 크기나 색깔별로 정리된 블록처럼 일목요연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글은 실용서나 자기 계발서에서 찾기로 하자. 순수 창작물을 읽는 사람, 그 독자가 작가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간단한것이 아닐것이다. 그 안목 높은 독자들은 그 만 피스의 조각으로 글을 쓰는 인간이 과연 무엇을 만들어 냈는가 혈안이 되어 지켜볼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는 그 조각으로 성을 만들고 어느 작가는 정원을 만들고 또 다른 작가는 자동차를 만들어 낼 것이다. 만 피스의 단어 조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서로다른 크기와 색과 면을 조합해 각자의 독특하고 고유한 무언가로 만들어 내는 열정이 바로 미학적 열정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매우 개인적인 취향인데 나는 글이라는 것은 단지 정보를 전달받거나 지식을 습득 하는 차원의 목적으로서의 글보다는 약간의 아름다운 창작품으로서의 글을 (읽고 쓰는 것 두 가지 모두에 있어서) 선호하는 편이다.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미학적 열정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낱말의 소리와 그로 인한 연상이 주는 기쁨,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이기도 하다.'


그것은 글 쓰기에서 내가 가장 희열을 느끼는 부분이기도 했다.


내게는 땅바닥에 뒹구는 버려진 물건을 주어들듯 단어들을 채집하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길바닥의 동전을 찾아다니는 배고픈 홈리스처럼 애절하고 절실하게 찾아다녔다. 어쩌다 마주친 유려한 단어는 무려 500백 원짜리 동전처럼 느껴졌다. 그런 단어들을 차곡차곡 저금통에 모았다가 필요할 때에 필요한 곳에 쓰는 보람은 견줄 곳이 없었다.


내가 수집하고 채집한 단어들을 정성껏 만지고 윤이 나도록 닦아 두었다. 불시에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도록. 그런 단어들은 내가 글을 쓸 때 이리로 저리로 자리를 옮겨지며 스스로 꼴을 갖추어갔다.

내가 주어 담은 유려한 단어들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들어지는 순간의 기쁨. 겨우 글자들이 나란하게 정렬되어 있을 뿐인데도 엄선된 단어들이 적소에 자리를 잡았을때 글도 아름다워 질 수 있었다.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인 문장은 그랬다. 그리고 그 하찮던 것들이 모이면 그것은 어느덧 그럴싸한 작품이 된다.


저금통에 모아두듯 쌓인 단어들을 털어 책을 만든다면 글자나 줍고 다니던 나에게 수고했다고 스스로 말해 줄 수 있는 명분이 생길 것 같아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내게 글을 쓰는 이유는 다양했다.

주어진 숙명인 듯 어쩔 수 없어 쓰는 한편 그럼에도 내가 글을 반드시 써야만 한다면 나는 그 글이 단지 정보 전달과 가르침을 넘어 그림과 음악과 시처럼 아름다운 작품이 되기를 갈망했다.


나는 되려 그것을 내가 타고난 재능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나는 계획적인 이야기꾼은 아니다. 밥을 떠 먹여주듯 자신을 써달라고 찾아와 주는 주인공과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더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작품처럼 우아하게 세상에 내 보일 수 있을까 고민 하는 아티스트에 가까웠고 그런 나의 노력이 유려한 문장이 되어 완성될 때 희열을 느꼈으며 끝내 자생을해 살아 나는 주인공이 되려 나를 위로 했다.  그러므로 나는 글 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


내 안에서 아우성치는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고역이고 그것을 거부 하는 것은 더욱 더 고역 이었다. 그러나 나는 운명을 받아 들이고 쓸때, 그것을 써 내려가고 있을때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최상의 기쁨이었다.

나는 살아지길 원하는, 생을 갈망하는 그 허깨비와 귀신들의 이야기를 좀 더 그럴싸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줘야만 할 것 같은 책임을 느끼기에 오늘도 배고픈 거지가 세상을 떠돌며 수집한 보따리 속 보물 같은 단어들의 더미 속을 미친 듯 헤집고 있다.


그렇게 골라낸 최상의 단어들이 질서를 가지고 나열되어 아름다운 문장으로 완성되듯 내 안에 무질서하게 엉겨 있는 그 유령들 에게도 각자의 인생이 최대한 아름답게 살아지기를 위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고통과 희열을 오가며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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