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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hayn May 09. 2022

넓어지는 아시아, 좁아지는 전장

에란겔의 폐허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에란겔: 다크투어> (2021)

Ⅰ. 넓어지는 아시아


아시아는 광활하다. 아시아는 복잡하다. 아시아는 분열적이다. 과거의 아시아라 불리던 하나의 수동적 타자는 소멸하고 주체적 아시아가 내부로부터 성장하고 있다. 스스로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아시아인들에 의해 새로운 아시아는 발명되었다. 아시아는 이제 지리적 좌표를 넘어 실천적 개념으로 작동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누가’ 그리고 ‘왜’ 아시아를 실천하는가 즉, 주체와 목적의 문제다. “장소의 공간(space of places)”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던 아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이제 “흐름의 공간(space of flows)”을 중심으로 연결과 이동 및 흐름의 틀 속에서 파악되는 인간 활동에 대한 이해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Castells, 1996) 이른바 거대한 네트워크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촘촘한 연결망에 개인은 던져지고 배치된다. 흐르는 관계에서 아시아는 위치를 선점하고 정체성을 선택한다. 예로 박모는 오랜 미국 생활 동안 스스로의 정체성을 ‘동양에서 온 이국적인 소수민족,’ 요컨대 ‘제3세계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적’ 수용 혹은 ‘한국적’ 적용을 누구보다 도 절박하게 모색했다. 그것은 마치 서도호의 한옥 작업이 물리적인 공간에 유성처럼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영국에 설치된 한옥과 한국에 재현된 그것은 전혀 다른 강도의 아시아 정체성을 주장한다. 동시에 네트워크의 유기성은 아시아와 함께 공진화한다.


네트워크 시대에 아시아는 지향성을 가진 미디어다. 아시아의 담론은 만들어 가는 이들은 스스로를 아시아인으로 배치하고 아시아 하기를 선택한다. 복수의 개별 아시아들로 분화한 아시아는 각각의 정체성을 개발하고 서슴없이 이를 드러낸다. 아시아의 본격적인 지역성 강화는 1980년대 아시아의 경제적 부상 과정과 관련이 깊다. 아시아 경제 성장 담론의 초점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으로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강해진 아시아들은 기성 패권의 견제 속에 부단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나간다. 아시아를 도구로 삼은 그들은 의식을 확장해 아시아의 바깥을 지향한다. 거대한 자본을 연료로 기술의 발전을 지렛대 삼아 지역을 넘어, 공동체를 넘어, 인종을 넘어 세계를 탐험한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아시아는 이제 가상세계로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며 세계의 큰 흐름에 스스로를 맡긴다. 가상세계는  진짜Virtual 이면서도 허구Virtual 의 것이다. 혹자는 ‘가상’세계이기에 형이상학적으로 ‘없다’라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도 하지만, 있으면서도 없는 아이러니의 지점에 가상세계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이미 ‘세계universe’로서 명명되었고 다양한 목적에 의해 적극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것이 그 반증으로 새로운 시장에 대한 욕망을 탐험의 연료로 사용한다. 자본은 가상세계에 성실히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매력적인 스펙터클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중세 대항해 시대에 해상 실크로드를 전지구적으로 확대해 값비싼 도자기와 향료, 농산물과 광물을 착취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가상 세계로 난민 행렬을 떠난다. 자본주의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확산되고 광활해지기만 한다. 그게 자본의 생존 법칙이다. 기업들은 포화상태의 광고시장을 떠나 여백이 많은 파란 바다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 폭발적인 투자 덕분에 기술은 유례없는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주요한 고객층의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기술은 신체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오래전부터 인류가 사용해온 안경은 시각의 영역을 더 멀리, 더 정교하게 보정해 준다. 보청기는 청력의 기능을 향상시켜 수집하는 소리의 범위를 넓힌다. 3D 프린터로 만든 인공 의수가 망가진 기존의 것을 대체하여 그 역할을 수행한다. 엑소 스켈레톤은 마비된 신체를 움직이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기술은 신체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수많은 탈것은 걷기, 뛰기로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기술은 우리의 신체를 메타버스라 불리는 가상세계로 향하게 한다. 기술은 이처럼 신체를 자유롭게 하면서 동시에 제한한다. 기술은 불행히도 독점적이며, 선택된 자들에게 선별적으로 기회를 제공한다. 기술에 대한 접근성은 대개 자본의 규모와 비례하며 이때 발생한 기술 권력 Technocracy 은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대중을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기술의 발달은 신체를 넘어 세계의 정치 구조를 변화시킨다. 기술에 내재한 권력은 사회의 메커니즘 전반을 아우른다. 기술과 과학이 힘의 논리로 작동하는 세계는 우리의 신체로 향하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바뀌게 한다. 


오늘날 기술이 만들어낸 가상세계에서 아시아는 유효한가? 아시아의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까? 자본이나 공간, 제도적 제약 등의 이유로 규모 면에서 비교적 작은 작업을 하곤 하는데, 가상 공간은 예술가들을 자유롭게 할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더 큰 제약이 되어 가능성을 제한할 것인가? 주체적인 확장을 거듭하던 아시아는 가상 공간에서의 모험을 상상하며 폐허의 공간, 에란겔로 여행을 떠난다.



Ⅱ. 좁아지는 전장


<배틀 그라운드>는 살인과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배틀로얄 게임이다. 외딴섬에 떨어진 플레이어들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상대방을 죽일 기회를 찾는다. 플레이어는 성능 좋은 무기와 효과적인 전략을 이용해 최후의 1인이 되기까지 치열한 전투를 한다. 게임의 묘미는 시간에 따라 게임 공간을 제한하는 파란색 자기장이다. 자기장 영역에 남을 경우 플레이어는 대미지를 입기 때문에 안전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좁아진 전장은 게임의 긴장감을 높여 더욱 몰입감 있는 전투를 가능하게 한다.



<에란겔: 다크투어> #1. 원주민(이경혁) 퍼포먼스 갈무리.


<<가상정거장>>에서 폐막 이벤트로 진행했던 <에란겔: 다크투어>(2021)는 게임 <배틀 그라운드>의 맵 ‘에란겔’에서 진행하는 폐허 관광이다. 참가자들은 서로를 죽여야 끝나는 게임의 규칙을 삭제하고 무리를 지어 폐허가 된 도시, 에란겔을 돌아다닌다. 플레이어들은 생존을 위협하는 자기장을 피해 좁아지는 전장 가운데로 계속해서 모여든다. 그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참가자들은 마땅히 일어나야 할 폭력을 인위적인 비폭력 행위로 전환해 공간의 성격을 전복시킨다. 분쟁의 땅이었던 에란겔은 무력해지고 전투를 위한 무기와 엄폐물은 그것의 소용을 잃는다. 본 프로젝트는 게임이 만든 고도화된 기술이 제공한 유희의 혜택을 거부하고 그것이 만드는 힘의 권력에 대항한다. 억압적인 기술 권력을 해체하고 연대가 불가능한 곳에서의 승리를 통해 인간성의 복구를 꾀한다.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에란겔은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의 프로그래밍된 가상 영토다. 참가자들은 게임 내의 임의적으로 생성된 캐릭터에 불과하며 이때의 살인은 사람이 아닌 가상 세계의 대역, 아바타의 참여를 중단시키는 것으로 살바타(?) 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연대는 인간의 것일까, 캐릭터의 것일까? 게임으로부터 로그아웃 한 참가자들은 현실에서 다시 연대하고 춤을 출 수 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혼란한 가상세계는 현실로부터 분리된다. 프로젝트는 주어진 기술을 활용해 허락된 플랫폼 안에서 일어난 지극히 소극적인 저항이 된다.


또한 60여 명에 달하는 게이머들의 정체성은 기획자에 의해 삭제되고 숫자 1, 2, 3으로 기호화되어 게임 내 삽입된다. 세 명의 퍼포머는 미리 정해진 계획에 따라 통제된 환경에서 반응이 소거된 플레이어들을 이끈다. 모든 돌발 상황은 관리되었고 정체불명의Playerunknown 선수들은 그저 동행할 뿐이다. 자유가 제거된 그들은 수동적으로 공간을 인식하게 된다. 프로젝트의 거대한 목적 하에 오브제로서 사용된 이들은 영원히 목소리를 잃었다. 참가하는 동시에 소외된 것이다. 바깥이 없는 에란겔에서 가능한 유일한 선택은 죽음이었다. 무명의 참가자들이 무기력하게 당한 죽음은 오히려 기술 권력에 대한 순응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투어는 영리하다. 에란겔의 플레이어들은 총을 거두고 춤을 췄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전장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지향성을 갖고 선택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끝내 죽음에 다다랐지만 숭고한 0킬을 이룩한 것이다. 프로젝트의 내용은 결국 현실 세계와 닿아있다. 우리는 내던져진 세계에서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을 알면서도, 주어진 네트워크에서 주체적으로 관계를 실천해나간다. 어차피 내려올 산이지만 고된 산행이 주는 땀방울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세상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참고문헌

박승우, 김기석, 백영서, 이남주, 이재현, 조희연 (2008). [아시아포럼] 한국에게 아시아란 무엇인가. 시민과세계(13), 286-30

신범식 (2021). 부상하는 메가아시아: 역사와 개념. 아시아리뷰, 11(2), 3-34.

우정아 (2016). <오리엔탈 마이노리티 이그조틱>.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45, 69-95

배틀 그라운드의 정식 이름 PUGB (Playerunknown's Battleground)는 국내에서 ‘정체불명 선수들의 전장’으로 오역되곤 했지만, 실제로는 개발자이자 감독인 브랜던 그린 Brendan Greene 의 닉네임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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