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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Aug 01. 2022

아이의 작은 밥상을 보았다

거실 한켠에 작은 나무 찻상이 놓여 있다. 아이의 간식을 줄 때, 밥을 줄 때, 놀이를 할 때 쓰는 상이다. 거의 밥상으로 쓴다. 나는 저녁을 먹지 않으므로 그 옆에 앉아서 아이 밥을 먹여준다. 티비를 틀어놓고, 티비에 정신이 팔린 아이 입으로 음식을 연신 넣어준다. 아이는 잘 받아먹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빙글빙글 돌다가 내 무릎 위에 앉기도 한다. 그 작은 밥상에 기대어 아이는 티비를 본다. 그 작은 밥상 위에 간식 그릇을 올려놓고, 아이는 조금조금 주워먹는다.


오늘 아이를 재우는데 눈물이 나왔다. 아이는 갑자기 "엄마, 옆으로 와도 돼"라고 말했다. 나는 베개를 끌어다 아이 옆에 놓고는 마주 보고 누웠다. 한참을 숨죽여 우는데 아이가 내 눈썹을 만졌다. 혹여나 눈물이 아이 손에 묻을까 봐 손을 자꾸 치우는데도 아이는 지긋이 내 눈을 누른다. 내 눈물을 누른다. 내 영혼을 누른다. 그 아이의 작은 손은 내 영혼을 누른다. 여름 더위로 땀에 젖은 그 작은 손으로 내 영혼을 누른다. 눈물은 더 나온다. 옆으로 흘러내린다. 베갯잎을 적신다. 아이는 서서히 눈을 감고 내 눈을 누른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살포시 내려놓고는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독립. 나홀로 섬. 혼자 서 있다는 건 춥다는 것. 옹송그라든다는 것. 외롭다는 것. 기댈 것이 없다는 것. 나에게 독립은 없다. 언제나 기댈 곳을 찾는 나는 추운 걸 끔찍하게도 싫어한다. 나에게 독립은 없다. 홀로 서지 못하는데. 홀로 있지를 못하는데. 약을 먹고 밥을 먹고 시원하게 똥을 싸고 나와 담배 한 대를 피운다. 가슴 한쪽에 커다랗게 난 구멍은 그 무엇으로도 매워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사랑으로도, 섹스로도, 다정한 말 한마디로도, 책으로도, 음악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시시덕거림으로도, 서글픈 울음으로도, 한바탕 웃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전 남편에게 사과를 했다. 내 병증과, 내 바뀌지 않는 습성 때문에 고통당했을 당신의 삶이 얼마나 황량했을지 이제야 깨닫는다고, 미안하다고, 고생했다고 했다. 전 남편은 "과거의 일은 어찌되었든 각자 잘 살아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장이 왔다. 아, 이 사람은 벌써 스스로 서 있구나. 어쩌면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끌어안고 황량한 바닷가 한가운데에 힘겹게 서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바닷속으로 빠뜨리지 않으려고, 않으려고, 않으려고, 애를 썼던 그 사람. 우리는 둘 다 바다에 빠져버렸다. 우리는 수영 중이다. 어딘가로, 어딘가의 섬으로, 홀로 오롯이 존재하는 그 고독한 섬으로 각자 수영 중이다. 그 사람은 아마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묵직한 슬픔과 고통이 나를 덮쳐왔다. 카톡에서는 시시덕거리는 남자들의 문자가 오고, 나는 ㅋㅋㅋㅋㅋ으로 몇 번이나 답장을 한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카톡에 빠져 있다가, 아이의 작은 밥상을 보았다. 함께하지 않는 식사. 아이는 몇번이나 자기 간식을 내 입에 넣어 주려 하지만 나는 받아먹지 않는다. 엄마는 괜찮아, 너 먹어, 하는 부드러운 소리로 거절한다. 작은 밥상 앞에 아이는 홀로 앉아 밥을 먹는다. 그 작은 등이, 그 작은 머리통이, 그 작은 밥상 아래에 들어간 작은 종아리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항상 인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를 만났던 사람들이 인복이 없는 것이었다. 나를 만나서, 나를 겪으며, 나를 알아 가면서 얼마나 불행해진 인간들이 많은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바꿔 생각하면 나는 인복이 많은 것이다. 나를 견뎌내 줄 사람들이 끊임없이 주위에 있고, 또 꾸준히 있어 주는 거니까. 우리 엄마, 우리 엄마의 생을 떠올리면 나는, 나는. 그리고 내 딸의 생을 생각하면, 나는. 나는 나를 하대한다. 나는 나를 처형한다. 나는 나를 업신여긴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결코 사랑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뜨거운 눈물을 씻으며 나는 다시 카톡을 켠다. 시시덕거린다. 웃는다. 그리고 운다.


아이가 자면서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 내 방 서재까지 들린다. 거실에 있는 아이의 밥상은 홀로 똑 떨어져 저렇게 놓여 있다. 내일 아침이면 전복죽이 놓여질 밥상. 그 앞에는 아이가 그리다 만 그림 종이가 툭 떨어져 있고, 옆에는 색색깔의 색연필. 그림을 그리다가도 티비를 틀면 고개를 돌리는 아이. 나는 소파에 눕고 아이는 티비를 보고. 그게 내 일상. 그러다가 티비가 지겨워지면 나랑 하는 공놀이. 그러다 스티커 놀이. 그러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영상 통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은 지 벌써 세 달이 되어 간다. 오늘 잠에 들기 직전에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엄마 미안해, 라고. 뭐가 미안해, 라고 말하면 아이는 아무 말이 없다. 엄마의 불안을 본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말. 엄마 미안해. 아이는 본능적으로 내 혼란을 읽고 있는 거다. 내 영혼의 고갈을 알고 있는 거다. 저 12.3kg의 작은 영혼은 내 영혼과 통하고 있는 거다. 나를 알고 있는 거다.


언제쯤 아이의 작은 밥상을 치우고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날이 올까. 내일이라도 당장 치워버릴까. 저 작은 밥상은 나를 쓸쓸하게 한다. 시시덕거리다가도 저 밥상만 보면 그 앞에 앉았던 아이의 몸뚱어리가 눈에 아른거린다. 내 병증이 더 심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나는 또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볼 것이다. 다 저질러 버릴 것이다. 움직일 것이다. 떠날 것이다. 해버릴 것이다. 나를 학대할 것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전부 나. 전부 나.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것처럼 빙빙 도는 이 병증의 늪에 나는 빠져 있다. 약은 챙겨먹지만 병증은 힘이 세다.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이내 얇디얇은 내 영혼의 겹을 뚫어버린다. 나는 녹다운되었다. 나는 어질어질하다. 나는 내일 혼자 비틀비틀거리며 어딘가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 사랑, 나를 네 단꿈으로 초대해 주렴.

내 사랑, 내 딸, 네 달디단 무지갯빛 꿈으로 엄마를 초대해 주렴.

문을 열어주렴.

언제나처럼 나를 용서해 주렴.

언제나처럼 내 눈물을 닦아 주렴.

엄마는 울고 있어.

엄마의 영혼이 울고 있어.

아냐, 내 사랑, 넌 가만히 단꿈을 꾸렴.

아냐, 내 사랑, 내 딸, 네 달디단 무지갯빛 꿈을 꾸렴.

이를 갈며 침을 흘리며 자는 내 사랑,

넌 날 살게 하는 유일한 존재.

이 생을 붙잡고 싶게 만드는 유일한, 또다른 생.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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