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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Aug 10. 2022

전 남편에게 아이 사진을 보낸다

오늘은 비오는 날, 네 살 아이는 줄무늬 원피스와 하얀색 긴팔 점퍼를 입고, 노란 장화를 신고 등원했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아이 친구도 분홍색 장화를 신고 있는 게 보였다. 친구가 "어, OO이도 예쁜 장화 신었네!" 하며 칭찬해 주자, 아이는 우쭐우쭐 몸을 흔들어 대며 좋아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한참을 손을 흔들며 아이와 인사하고는 웃으며 뒤돌아 나왔다. 쨍한 노랑색의 장화 끝이 아이의 종아리에서 뚝 끊기는 것과, 원피스가 아이의 허벅지께에서 살랑거리는 그 소녀 같은 느낌은 내가 봐도 예뻤다.


집에 와서는 한숨 잤다. 나는 흔한 악몽을 꿨고, 일어나자마자 초코칩 스콘을 하나 해치웠다. 폰을 보니 키즈노트 알림장이 와 있다. "어머님, 오늘 OO이가 '엄마가 노란 장화 사줬어'라고 자랑하더라고요." 하고 적혀 있었다. 딸의 노란 장화는 할머니가 사주신 것. 순간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흐뭇하게 사진을 여러 개 저장하고 나서는 바로 그 사람, 전 남편의 카톡 대화창을 열었다. 아이를 항상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아닌, 전 남편에게 나는 곧장 아이의 사진을 여러 장 보낸다. "추워서 겉옷 입혀 보냈으니 걱정 마요" 라는 메시지와 함께. 곧바로 답장이 왔다. "네 고마워요".


사진을 보내 줄 때마다 전 남편은 꼭 고맙다는 소리를 한다. 어제 유아 도서관에서 찍은 아이 사진을 보내 줬을 때는 "OO이가 도서관에서 제일 말이 많고 제일 활동량이 많았어요. 얌전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아요" 하고 첨언을 했더니 "시종일관 뛰어다니니 얌전한 성격은 아닌 듯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돌아왔다. 나는 곧바로 웃었다. 당신도 아는구나, 우리 애가 엄청 활발한 성격이라는 걸. 당신도 아는구나, 우리 애 기질 자체가 그렇다는 걸. 뭐, 당연한걸. 당신은 아이 친아빠인데. 당신이 얼마나 당신 아이를 금지옥엽으로 아끼는지 나도 아는데.


그런 메시지 몇 개 주고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이혼이 마냥 쿨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묵은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고, 나는 전 남편을 심지어 그리워할 때도 있다. 그리고 맹렬히 미워할 때도 있다. 얼굴이 꼴도 보기 싫을 때도 있다. 지나치게 냉정한 사람이라고 가슴을 치며 욕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제 오늘, 전 남편과 메시지를 나누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것도 어쩌면 '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형태로 자리잡아 가는 건 아닐까, 하는 감정이었다. 이렇게, 아이의 소소한 일상을 카톡으로 공유하면서, "OO이는 아침 7시에 일어났고 똥 쌌어요" 하는 현실적인 말들을 주고받으며, 아이의 얼굴을 보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방식대로 느끼는 것.


이혼 1주년이 지났고, 나는 하던 일을 잠시 그만두었으며, 양극성 정동장애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다. 그와중에도 나는 전 남편에게 묵묵히 아이 사진을 보낸다. 사진을 보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어쨌든 그 사람과 이어져 있고 싶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아이의 친아빠라는 것을 매순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아이를 아낀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의 친권자이자 주양육자인 나는, 지금과 같은 힘든 상황 속에서 전 남편을 미워할 법도 하다. 하지만 미워해 봤자 뭐하겠는가. 천지개벽이 일어나서 아이의 친아빠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셋 모두 스러져 저 하늘의 별이 될 때까지 영원히 가족일 텐데.


아직도 나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전 남편과의 카톡 대화창을 제일 먼저 연다. 그 사람과 상담을 먼저 한 후에 엄마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곧 있으면 아이의 왼쪽 관자놀이에 난 혹을 제거하기 위해 서울 병원에 간다. 가서 그 사람을 또 만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1초 이상 빤히 쳐다보진 않겠지만, 초조한 손가락을 말아쥐며 아이를 지켜볼 것이다. 똑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걱정할 것이다. 정말 이상한 마음, 이상한 느낌. 아이 덕분에 전 남편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 결코 그 사람과 같이 살 생각도, 합칠 의도도 없는데도, 아이를 매개로 이어져 있다는 그 느낌은 정말 이상하다. 아이의 엄마 아빠는 그 사람과 나라는, 때려 죽여도 바뀔 수 없는 그 사실이 나를 오히려 안정시킨다.


네 시 반 하원 시간이 다가온다. 아이는 왠지 내게 노란 장화 이야기를 꼭 할 것만 같다. 엄마, 노란 장화 신었어요. 엄마, 예쁜 노란 장화 신고 빗물놀이 했어요, 뭐 그런 이야기들이 예상된다. 나는 그랬어? OO이가 예쁜 노란 장화 신고 놀았어? 하고 대꾸해 줄 것이다. 아이가 좀 크면, 좀 더 크면, 꼭 이야기해 주고 싶은 게 있다. 몇 번을 브런치에도 썼다 지운 것이라 쑥스럽지만 또 말해 본다.


우리 딸.

엄마랑 아빠는 비록 떨어져 살지만, 그리고 아빠는 너와 멀리멀리 있지만,

우리 셋은 결코 헤어지지 않아.

우리 딸이 있는 한 엄마 아빠는 영원히 너와 함께야.

엄마랑 아빠가 죽을 때까지 널 보살펴 줄게.

사랑해,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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