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끝.

by 최미야

새벽에 '그'에게 전화가 왔다. 허튼 짓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넌 못해. 너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딸 보러 가. 그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그리고 1시간 넘는 시간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나를 설득했다. 넌 아프니까, 못할 거야. 집으로 돌아가. 내 계획을 구체적으로 묻더니 넌 못할 거야, 라고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를 반복했다.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한데 나는 견고했다. 그의 애원 섞인 말에도 내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듣기 싫어서 전화를 끊어 버리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카톡이 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아. 그는 내게 너 같이 못되고 제멋대로인 애는 처음 본다고 했다. 나는 그러려니 했다. 맞는 말이니까. 너 조증이라 그래. 아파서 그래. 지금 너가 모르는 거야. 아니에요, 나 지금 약 잘 먹고 있고 난 철저히 정상인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에요. 그는 듣지 않았다. 연락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결국 술먹고 전화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그가 고맙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어쩌겠는가. 죽으면 끝인데. 여장부로 태어나서 세상에 한번 출가해 보지도 못하고 죽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난 체급이 다르다. 난 헤비급이다. 어떤 부분은 매우 연약하고 툭 하면 부서질 것 같지만 내 본성은 강하다. 난 할 수 있다. '그'의 설득에도 난 넘어가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자기 합리화일지도, 정신 승리일지도, 행복 회로를 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이다. 더 늦으면 난 죽을 날만 기다리며 도살장에서 달달 떠는 소같이 살았을 것이다. 멍에를 풀고, 끊고, 버리고 가야 한다. 지금 가지 못하면 난 죽은 영혼이나 마찬가지다. 살아 있어도 죽은 채로 있어야 할 판이다. 그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


어제 저녁 엄마 아빠에게서 계속해서 전화가 왔고 난 받지 않았다. 카톡이 왔길래 아는 언니네 있다고 말했고 엄마는 딸과 영상통화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알았어, 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엄마는 어디 있고 너무 급한 일이 생겨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딸은 '엄마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라고 했다. 엄마가 옆에 오더니 '언제 올 거야?' 하고 물어서 나는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엄마, 나 안 돌아가. 다시는. 다시는 엄마집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래도 그렇게나마 딸과 통화를 했더니 마음이 좀 놓였다. 딸의 얼굴을 보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견뎠다. 나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딸을 안심시켰다. 우리 딸. 엄마는 지금 모텔방에서 혼자 담배 피우면서 글 써. 갈 데도 없고 돈도 없어. 떠돌고 있어. 엄마는 지금 뭘 하려는지 정확히 알고는 있지만 많이 두려워. 우리 딸, 엄마는 자립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어. 나중에 크면 너가 이해할 거야. 엄마가 왜 이렇게 미친 짓을 해가면서까지 집을 나오려고 했는지 말이야.


아침 10시가 되자마자 어제 만났던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닝커피를 하자고 했다. 혼자 떠돌고는 있어도 옆에서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나는 또다시 안도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요즘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텔 앞에서 둘이 맞담배를 피우고,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런 기괴한 상황에서 나는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한데,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결심히 강해지기만 한다. 돌아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무직에, 조울증을 앓는, 엄마집에서 빌붙어 사는, 용돈을 타쓰는 일개 벌레 인간처럼 살기가 싫어졌다.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작은 성공들, 자기 확신이다. 면접에 붙고, 방을 구하고, 일을 한다. 버틴다. 그게 다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허황된 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특히 엄마 아빠는 생각이 아주 많으실 거다. 지금쯤이면 딸이 전 시가에 갔을 터다. 전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보고, 또 아빠를 만났겠지. 딸이 소중하고 귀한 것과는 별개로 내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과업이다.


다시 한 번, 죽으면 끝이다. 죽으면 진짜 끝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그 전에 이 한 판 제대로 붙어봐야 한다. 이놈의 세상 체급이 헤비급보다 높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만만찮은 인간이다. 만만찮게 미쳐 있고, 만만찮게 돌격한다. 병식이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른다. 조증 때문에 갑자기 이러는 건지도 나는 모른다. 그저 내 이성을 믿고 내 판단을 믿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세상에 나를 던져둘 수밖에 없다. 온실 속 화초로만 살아온 지 42년째, 나는 진짜 질렸다. 더이상 보호자 밑에서 숨막히게 내 본성 참아가며 사는 데 질렸다. 단 한 번뿐이라도 내 맘대로, 내 성질대로 살아보고 싶어서 나는 온 것이다. 나는 월든 호숫가로 갔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처럼 명문은 못 쓴다. 나는 삶을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 떠났다. 후회하기 싫어서 떠났다. 죽으면 끝인 이 인생에서 딱 한 번만이라도 세상 속에 나를 홀로 던져두고 싶어서 떠났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는 지금 필요없다. 나는 나 자신을 믿고 또 믿어야만 한다.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야 한다. 증명해내야만 한다. 난 살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내는 사람이다. 관성대로, 버티기 식으로 사는 건 질렸다.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하는 일을 바꾸고, 만나는 사람을 바꾸고, 장소를 바꿔야 한다. 나는 지금 그 셋을 단 한 번에 하려고 한다. 많은 힘이 들겠지만 난 그럴 만한 신념과 힘이 있다. 비록 춥고 좁고 어두운 모텔방에 있지만 꿈만큼은 원대하다. 비웃음당해도 좋다. 얼마든지 비웃으라 하지. 난 해낼 거다. 잘해 낼 거다. 반드시 해야만 한다. 지금 쓰는 글들은 내 자기 확신을 위해 하는 주문이다. 내 작은 인생에서의 전환점이 바로 지금이다. 며칠째 제대로 된 밥을 못 먹었다. 돈이 없어서. 그치만 마음만은 풍족하다. 나는 대탈출 중이다.


당신이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저는 독립입니다.

꼭 독립하고 싶습니다.

죽기 전에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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