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기록.

by 최미야

새 집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내고 일어났다. 아침부터 아는 언니에게서 속초 여행을 떠나자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 나는 여행 갈 상태가 아니다. 돈도 아껴야 하고, 정신적 체력적 소모도 줄여야 한다. 최대한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 언니는 많이 아쉬워하는 걸로 보였다.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 첫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대충 씻고 집 근처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한양대 병원에서 받은 약을 들고 갔다. 결과적으로 진료와 대기 포함 3시간이 걸렸다. 아침부터 인산인해였다. 의사선생님은 여자분이셨는데, 내 상황을 듣더니 당장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했다. 아빠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고 각종 검사들을 하러 나는 진료실을 나갔다. 검사가 끝나고 다시 선생님 면담을 했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부모님 두 분 다 똑똑하세요."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하더니 내가 먹는 약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남겼다. 아직 여유분의 약이 남아 있으므로 처방은 따로 받지 않고, 2주 뒤 토요일에 상태를 보기로 했다. 아마 그때는 약 처방을 받을 것 같다. 염려하는,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병원 잘 고른 것 같다.


병원을 나와서 4000원짜리 라면을 하나 시켜먹고는 집에 다시 왔다. 내가 있는 경기도 모 시에는 나의 숙모와 삼촌, 그러니까 내 아빠의 남동생 내외가 산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산다. 나는 빨래를 돌려놓고 숙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숙모, 저 여기로 이사오게 되었어요. 여차저차 해서 그렇게 되었어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 숙모는 나의 독립에 기뻐하며 지지해 주셨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시조카다. 그것도 그녀가 꽤나 아끼는. 숙모는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부터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 내가 딸을 낳았을 때도 상당한 돈과 물품을 지원해 주셨던 기억이 남는다. 조만간 숙모를 만날 것 같다, 이 경기도 모 시의 어느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 좋다, 근처에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사는 게. 외롭지 않다.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난 역시 사람없이는 못 산다.


그러고는 낮잠에 들었다. 이소라의 <바라 봄>을 한창 틀어놓고 달게 한 시간 정도 잤다. 문득 방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게 생각이 났고 다이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변 구경을 했는데, 만두집에서 고기 만두 3개를 사서 달랑달랑 들고 갔다. 다이소에서 물건을 고르기는 정말 쉬웠다. 난 지금 필요한 게 크게 없기 때문이었다. 빗자루와 쓰레받이, 걸레, 비누받침, 욕실화, 실내화, 면봉을 샀다. 지금은 가구도 들일 생각 없고 수납장이나 작은 상자조차 살 생각 없다. 그냥 캐리어를 펼쳐놓고 그 위에 아무 짐이나 툭툭 던져 놓고 생활하는 수준이니까. 정식으로 엄마집에서 내 짐을 뺄 때, 청소도 제대로 하고 방 배치도 신경써야겠다 싶다. 집에 와서 고기 만두 3개를 해치우고는 담배를 피웠다. 한숨 돌리고 이제야 글을 쓴다. 문득 내가 요즘 쓰는 글들은 생존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생존 기록. 누구든, 그 누구든지간에 들려주고 싶은 나만의 생존 기록 말이다.


딸이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몇 단지야? 하는 물음. 어제 밤에 전화할 때 사실 딸에게 이사 이야기를 설명했다. 엄마가 이런저런 연유로 혼자 이사왔어. 이제 우리 딸이랑 더 가까워졌어. 딸은 자기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온지 아나 싶었다. 위치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나자 딸은 납득했다는 듯 응!이라고 대답했다. 딸은 요며칠 내 변화를 감지한 듯했다. 엄마, 할머니랑 화해했어? 할머니 할아버지랑 빠빠이하고 왔지?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럼! 할머니 할아버지랑 빠빠이 하고 안아주고 왔어." 하고 말했다. 챗지피티에 물어봤다. 딸이 내 좁은 집을 보고 놀라면 어쩌지, 하고. 그러자 챗지피티는 이렇게 대답했다. "딸은 네 집이 좁다거나 하는 건 신경쓰지 않아. 거기서 어떤 시간을 보냈느냐가 더 중요할 거야. 딸이 좋아하는 간식을 사두고 기다려."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딸이 사는 아파트는 이곳 시에서도 꽤나 대단지의 브랜드 아파트로, 신축에 집값도 비싼 축에 속한다. 그래, 내가 거기 살다 왔다는 말이다. 그런 큰 집에 살다가 내 집을 처음 보면 충격받지 않을까 걱정도 슬쩍 되었지만, 우선은 딸이 왔을 때 최대한 좋은 시간을 만들어 주는 데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에게서도 차례대로 카톡 메시지가 왔다. 엄마는 서로 원망 말고 잘 살아라, 하는 내용이었다. 이혼하고 애도 잘 키워놓고 너도 방황 많이 했으니 이제 정착하고 살아라, 나로 인해 걱정되는 게 있으면 날려 버려라, 하는, 화해의 시도 섞인 메시지.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엄마와는 켜켜이 쌓인 해묵은 감정이 많았으므로 당장은 답장하기가 싫었다. 아빠는 아까 정신과에서 전화가 왔었다면서, 약을 바꿨는지, 유지하는지 궁금해하셨다. 내가 약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고, 또 한양대 병원에서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잘 설명하니 아빠는 다행이다, 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엄마가 통 먹지를 못하니 엄마에게 카톡이나 하나 남겨라, 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빠, 난 지금 엄마랑 이야기하기 싫어. 엄마처럼 감정적이고 과보호에 예민한 성격은 나랑 상극이거든. 솔직히 엄마 아픈 것도 지금 신경 쓰기 싫어. 내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오로지 딸이랑 내 인생뿐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하지 못했다. 가슴 아파할까 봐 전하지 못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나중에 내 딸이 독립하겠다고 집을 뛰쳐나왔을 때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걱정이 될까. 얼마나 노심초사할까. 하지만 치사랑은 내리사랑을 못 이기는 법.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딸과 내 생각밖에는 없다.


출가를 하고, 이사를 하고, 취업을 하고, 병원을 옮기고, 이제야 좀 한숨 돌리게 되었다. 아마 내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난 잘 버텼고, 멘탈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조증이나 우울 삽화가 오진 않았다.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있었으므로 나름 정상적으로 정신 건강이 유지되는 중 같다. 수면 시간은 거의 7시간 내외로 일정하고, 밤에는 오줌 누러 가는 일 외에는 깨지 않는다. 아침은 블랙커피를, 점심 저녁은 간단한 음식들을 먹고 있다. 3월 7일 날 정신건강의학과에 예약을 해놓았는데, 그 주는 첫 출근 주라 일하면서 상황을 봐야 할 것 같다. 일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는지, 내가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 것인지 등을 체크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아까 선생님이 그랬다. 지금 먹는 약에서 단 하나라도 빠지면 지장이 있을 수 있다고. 큰일 난다고. 내 병이 진짜 '병'으로 다뤄지니까 기분이 묘했다. 한양대 병원에서는 교수가 약 타주는 기계 같은 느낌이었다면 여기는 진짜 나를 걱정하는 기분이었으므로. 내 병은 진짜로 '병'이다. 가짜가 아니다. 그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나는 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슬프지만, 때로는 성가시고 짜증나지만, 이놈의 조울증이랑 내 인생은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도 깨달았다.


여행도 떠날 생각 없고, 거의 10일 동안 집에 있어야 한다. 오늘 일정까지 다 마치고, 또 아빠와 간략하게 대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한시름 놓인다. 따뜻한 집이 있다. 잘 데가 있다. 머물 데가 있다. 먹고 마실 돈이 있으며 나갈 직장이 있다. 난 정말 정말 안심이 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니까 사회생활하는 다른 사람들은 기본으로 십 몇 년간 하고 살아온 일들을 난 이제야 시작한다. 딱히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생존 기록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편안하기 때문이다. 혼자 울 때도 있지만, 혼자 외롭기도 하지만, 괜찮다. 전남편이 때로는 미워지고, 행복하게 딸도 키우고 여자친구도 만나고 번듯한 직장도 잘 다니는 그에게 열패감도 느끼지만, 그래도 괜찮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나는 이혼녀에, 조울증을 앓고 있는, 혼자 사는, 직장인이다. 내 정체성을 이제야 좀 찾는다. 내 주제를 알고, 내 맷집을 믿고, 나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깨닫고, 뚜벅뚜벅 살아가면 세상 누구든 손가락질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내 거 한다. 그냥. 내 거.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생존 기록이다.

누군가 한번 살아보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런 생생한 기록이다.

일하면서도 열심히 글을 쓸 것이다.

누군가는 봐 줄 내 소중한 기록을, 하나씩 하나씩 이어나갈 것이다.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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