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by 최미야

날이 풀렸다. 이젠 홈웨어에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편의점에 가도 달달 떨지 않고 잘 다녀올 수 있는 날씨다. 그런 와중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사람이 살지 않던 원룸에 곧장 입주해서 보일러만 틀고 잤더니 공기가 안 맞았나 보다. 어제는 새벽 5시에 깨고 말았다.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어제 아침에 충청도에 사는 친구와 메시지를 나누다가 급하게 약속이 잡혔고 나는 충청도 모 시로 내려갔다. 만나서 그 친구가 다니게 될 미용학원도 들르고, 장도 보고 해서 친구 집으로 들어갔다. 네 식구 단란한 모습을 보니 좋았다. 친구의 남편과 나, 그리고 친구 셋이서 술상을 차려 먹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므로 딸기우유를 내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 냄새 좀 맡으니 살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원룸에 처박혀 글만 쓰고 살았더니 좀 답답했었나 보다. 우리는 지난 세월 이야기와 여러가지 근황 이야기를 했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는 친구가 새삼 멋졌다. 그리고 좀 더 단단해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친구는 오늘 아침 나를 터미널로 바래다주고 슝 갔다. 완벽한 1박이었다.


콧물을 찍찍 짜내며 글을 쓴다. 집에 돌아와보니 현관문 앞에 택배가 잔뜩 쌓여 있었다. 멀티탭, 캔들, 그릇, 하수구트랩 등등. 난 그릇을 정리하며 기분이 매우 좋았다. 포르투갈산인데 너무나 깔끔하고 빈티지한 느낌도 있다. 이제 이 그릇들로 딸과 밥을 먹겠지? 하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그러다 세탁기를 돌리러 가는데 세상에, 문틈에 바퀴벌레가 여러마리 죽어 있는 게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당장 바퀴벌레 약을 주문하고 세스코에 전화했다. 이따가 6시 이후에 방문 점검을 온다고 했다. 원룸에 이사 오니 이만저만 살림 장만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빨래걸이도 사야 한다. 밥솥은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남는 게 하나 있다고 사지 말라고 하셔서 결제하지 않았다. 최소한으로 사려고 노력하는 데도 돈 50이 우습다. 하긴 그렇다. 처음으로 나 혼자만의 살림을 장만하는데 필요한 게 많을 것이다. 세스코 점검이 끝나고 방역까지 마치면 좀 안심하고 가구를 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난 집이 좁고 험해도 벌레만 안 나오면 된다)


이제 출근이 4일 남았다. 딱 봄이 시작되는 춘삼월에 직장에 첫 출근을 한다. 딸은 오늘 아침에 엄마집에서 고모집으로 갔다고 들었다. 오늘부터 딸에게 전화는 이틀에 한 번만 할 수 있다. 카톡은 수시로 보내도 되지만 전화를 자주 할 수 없는 게 아쉽다. 어제 친구와 방에서 한잔 더 하는데(나는 여전히 딸기우유를 먹었다) 친구가 내 딸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어쩜 이렇게 귀엽냐고, 어쩜 이렇게 천사같냐고, 어쩜 이렇게 예쁘냐고 칭찬하는데 으쓱했다. 난 세상에서 내 딸 칭찬이 제일 좋다. 딸 이쁘다고 하면 그냥 헤벌쭉 입가가 느슨해진다. 그것도 나를 쏙 빼닮은 딸이기에 더 그렇다. 솔직히 전 시가에서 친손녀가 성장할 때마다 떠나간 전 며느리를 닮아가는 걸 알아차릴 때 느낌을 상상해 보았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 애의 친엄마는 빼도 박도 못하게 나인데. 그나저나 신기하다. 외탁이 어지간히 센가 보다. 나도 첫째딸인데도 엄마를 많이 닮았고, 내 딸도 첫째 딸인데도 나를 많이 닮았다. (나를 닮아서 내심 안심이었다, 전남편이 못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튼 그렇다)


방 공기를 바꾸기 위해서 향초를 샀는데 꽤 괜찮다. 담배 피우고 들어왔을 때 집 안에서 머스크향이 확 풍긴다. 기분 좋다. 이 집에서 사계절을 두 번이나 날 예정이다. 겨울, 그리고 봄. 봄이 온다. 친구의 말이 기억난다. 마냥 꽃길은 없더라. 나도 안다. 가시밭길일지언정, 발에 피가 나고 상처로 찢길지언정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이제는. 다시는 조증 발작이 일어나지 않도록 약으로 잘 관리할 것. 새로 찾아간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이 그러셨다. 2주에 한 번씩 내원해서 상태를 체크해 보자고. 난 주말에도 1일 일하기 때문에 스케줄 잡는 건 좀 힘들지만 그래도 시간을 맞춰서 꼭 병원에 갈 것이다. 1순위가 나 지키기이다. 몇백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나 지키기. 내 건강 지키고, 내 정신 안정시키고, 내 행동 양상을 관찰하는 것. 항상 병식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입원은 이제 다시는 없을 일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 병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내일 저녁에는 당근 모임에 두 차례나 나간다. 이리로 이사 오자마자 당근 모임에 다섯 곳이나 가입했다. 난 친구를 만들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쓴다.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 친구란 게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그래도 노력해 본다. 나를 드러내고, 또 그들을 바라본다. 결이 맞고 대화가 통하면 그때부턴 무조건 친구다. 옷은 딱 두 벌 있지만 깨끗이 씻고 화장하고 나갈 예정이다. 부디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기를 바란다. 난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연락할 사람이 없으면 금방 풀이 죽는다. 친구는, 쉽게 떠날 수 없는 사람이다. 난 손절도 잘 못한다. 오늘 날 데려다준 충청도 사는 친구가 그랬다. 너 외로워서 그래. 그거 사람 잡는다? 응 맞아. 내가 무슨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도 맘대로 못 보고, 부모님은 이제 멀리 떨어져 살고. 일을 시작하면 정신없겠지만 외로움은 날 또 찾아오겠지. 참, 질기디질긴 그놈의 외로움이란 자식.


이 낡고 좁은 원룸이 어떻게 바뀌어갈지 기대가 된다. 어제는 동네 세탁소 아저씨와도 안면을 텄다. 같은 건물에 사는 여자 한분하고도 인사를 나누었다. 근처 편의점은 이미 단골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좀 느리다. 아,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 사람의 선은 여기까지구나, 하는 걸 좀 늦게 알아차리는 편이다. 몰랐다. 난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었다는 걸. 난 정말 나밖에 모르는 놈이라는 걸. 하지만 사회성은 충분히 기를 수 있는 것, 구르고 까지면, 닳고 닳으면 좀 둥글둥글해질 수 있는 게 또 사람이다. 천성이 예민하고 잠귀가 밝으며 입도 짧고 취향이 까다로운 편인 내가, 사회생활을 하려면 둥글둥글해지는 건 필수다. 내 본성을 자리에, 상황에 맞게 숨기고 또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각오만큼은 대단하다.


봄이 오면, 꽃놀이를 가야겠다. 오프날 시간을 내서 서울 사는 고모와 친구들도 보고 해야겠다. 좋은 날이 오겠지, 하고 바라기만 하는 건 지치고 질렸다. 너무 수동적이다. 내가 간다. 내가 좋은 날에게 간다. 가출했을 때 나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와준 그 언니가 그랬다. 지금 여기에 있음을 알아차리라고. 수시로 그렇게 하라고. 그러면 좀 낫다고. 운동이 좋다는데 난 운동하는 걸 너무 싫어하니 산책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나에게 명상이란 글쓰기이다. 지난 브런치 글에서도 썼었지만 나는 글로써 명상을 한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데 내게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일을 시작하고 나면 어찌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브런치에서 왕성하게 활동할 예정이다. 이 모든 게 독립을 해서 그렇기도 하다. 나 혼자 있으면 나 스스로를 달래줄 무언가를 해야만 하니까. 그것도 아주 좋은 방법으로 말이다.


내일은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가볼 예정이다. 가서 책도 좀 둘러보고, 차도 마시고, 산책 좀 하다 와야겠다. 출근을 앞두고 이렇게 신선놀음처럼 보내도 되나 싶은데, 어차피 일 시작하면 지옥불구덩이에 떨어질 것을 알기에 (웃음) 미리미리 즐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봄이 오면, 일을 시작한다.

봄이 오면, 우리 딸이 초등학교에 등교한다.

봄이 오면, 많은 게 달라질 것이다.

기대하고 있다.

내 인생의 봄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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