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게 뭐가 나빠. 사람을 믿는 게 뭐가 나빠. 마음을 빨리 여는 게 뭐가 나빠. 난 항상 진심을 다하는데. 난 항상 솔직한데. 근데 사람들은 조금 더 영악해지라고 한다. 패스트푸드처럼 빠르게 빠르게 움직이길 원한다. 상처받기 싫으면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한다. 난 그렇게 못한다. 난 항상 진심을 다하고, 마음을 연다. 이번 주는 참 힘들었다. 일이 힘들고 사람이 힘들고. 어제는 전전 남친이 내가 사는 곳으로 왔다. 만나서 커피를 마시면서 지난 소회를 간단하게 풀고 헤어졌다. 그 사람을 다시 보니 내가 왜 헤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신의 확신. 오늘 내일 쉰다. 간만에 이틀 연속으로 쉰다. 나는 환승이직을 할까도 생각한다. (이미 이력서를 냈다) 마음이 조금 복잡하다. 40대에 이렇게 일만 하고 보낸다고? 이렇게 특별한 이벤트 없이 쭉 간다고? 내게 엄청난 회환과 미련은 이제 떨쳐버렸지만, 난 아직도 어딘가 특별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을 줄 기대한다. 난 정말 순진한 바보인가 봐. 그런가 봐.
여기서 삐끗하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접어든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자꾸 궤도를 이탈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 그냥 산에 처박혀서 글이나 쓰고 싶다는 생각.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들이 휘몰아친다. 40대는 그런 것이다. 이제 인생 노선이 어느 정도 정해져서, 뭔가를 바꾸기엔 힘든 나이. 그치만 나는 항상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한다. 이것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자 한다. 친구가 그랬다. 자기는 사랑받는 느낌이 없으면 하루도 견디기 힘들다고. 사실 나도 사랑받고 싶은 건 아닐까? 누군가 나에게 관심써주고, 사랑해주길 바라는 건 아닐까?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버틸 만한 힘이 생기는 걸까. 하지만 나는 이미 딸에게 사랑받고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 남자랑 딸이 같냐! 하는 호통이 날아올 것 같은데. (웃음) 사람들이 왜 인생의 동반자를 찾아 나서는지 알 것 같긴 한데. 난 지금 필요한 게 사람인지 글인지 일인지 모르겠다. 난 또 왜 방황하는가. 난 또 왜 새로운 길을 찾아나셔러고 하는가. 참으로 복잡한 존재다.
마음이 공허하면 뭔가를 자꾸 사고싶어진다고 했다. 나는 그저께 백화점에 갔다. 고야드에 가서 가방을 하나 보고 살까 말까 하다가 그냥 나왔다. 불가리에서 반지 세척을 받고 지갑 수리를 맡겼다. 지갑은 5년 정도 써서 그냥 버릴까 한다. 질리기도 했고, 망가진 건 쓰기 싫어하는 내 특성상 더 이상 들고 다니기가 싫어졌다. 아무튼 나는 161만 원이나 하는 고야드 파우치를 포기하고 다이소에 가서 1000원짜리 털 파우치를 하나 샀다. 거기에 현금과 카드와 신분증과 담배와 핸드크림과 바디미스트를 다 넣었다. 161만 원을 1000원으로 막았으니 다행이다. 난 정말 돈관리가 안 되는 놈이다. 특히 조증 발작이 올라왔을 때 수중에 돈이 있으면 전부 다 아작난다. 탈탈 털어서 없어질 때까지 써버린다. 난 외롭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꾹 참고 있다. 그래, 난 꾹 참고 있다. 힘이 든다. 외로움을 견디는 건 힘든 일이다. 정말.
이 정도 살았지만 아직 세상에는 놀랄 게 더 많다. 아직 나는 겪어볼 게 많다. 좀 기대가 되기도 한다. 난 언제나 세상에 기대하는 놈이니까. 좌절이나 실패도 새로운 발견이다. 아, 이렇게 사람이 절망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조차도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난 정말 어쩔 수 없이 일희일비하는 낙관주의자. 순간순간 흔들리지만 그래도 낙관적으로 인생을 바라보려고 한다. 아직도 순진하게 세상을 믿는다. 아직은 선함이 남아 있을 거라고, 아직도 다정함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고 기대한다. 전전남친이 그랬다. 넌 맑은 아이라서 아마 앞으로 상처받는 일이 많을 거야.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떼어내도 떼어내도 다시금 달려오는 강아지처럼, 나는 세상에 그렇게 달라붙는다. 다시금 한판 붙어본다. 어쩔 수가 없다. 난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기 때문에. 쉽게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절망해도 다시 한번 고개 올리고, 좌절해도 다시 한번 길을 내디딘다. 이런 내가 싫지 않다. 자화상은 아무래도 긍정적으로 가져가는 게 나으니까. 어쨌든.
독립은 했는데 사람은 만나고 싶고, 이직은 하고 싶고, 돈을 더 많이 벌고 싶고, 딸과 더 친해지고 싶다. 쓰고 보니 욕심이 너무 많다. 한 가지만 잘해도 선방하는 건데 (웃음) 난 한 번에 많은 것을 움켜쥐려 한다. 하지만 일은 그런 식으로 되진 않는 것 같다. 운칠기삼이라고 기세로 가져가는 건데, 난 지금 기세가 좋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기세등등하지도 않고 침체되어 있지도 않다. 사람들은 어찌나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건지! 그걸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난 늦게 배우고 늦게 깨우친다. 한 박자 늦다. 오늘은 죽음을 생각하기 싫은 날이다. 내가 영영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싶은 날이다. 사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사유하고,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난 어떤 식으로든 변할 것이고,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묻고 싶다. 순진한 게 뭐가 나빠. 이 험한 세상, 순진무구함으로 부딪히는 게 뭐가 나빠. 피 흘리라지. 상처 입으라지. 다 감당해 줄 테니. 난 그런 용기가 있다, 아직.
난 직면하고 돌파한다. 휘둘러 애둘러 돌려 말하는 거 잘 못한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직진하진 않는다. 나도 인간적인 눈치라는 게 있으니까. 어쨌든 세상은 참 이상하고 요상스런 곳. 아직도 놀랄 게 많은 곳. 나는 지구별 여행자. 언젠가 이 여행 거두고 저 멀리 가야 할 여행자. 가끔은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영원할 것 같은 이 여행이 언제 끝날까? 솔직히 나는 엄마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다면 일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냥 그저 그렇게 살았을 것 같다. 하지만 딸이 있기에 나는 번듯한 일자리와 잠자리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자아실현을 하고 싶은 욕구와, 엄마로써 잘 기능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충돌하는 것 같은데, 참 이게 어렵다. 그게 하나로 합치되어 잘 나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좀 횡설수설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횡설수설하는 것조차도 나. 좀 어지러우면 어때. 한숨 자고 일어나는 거다. 난 사람을 다시 믿을 거고, 내 마음을 활짝 열어보일 것이다. 거짓말은 안 한다. 장난은 안 친다. 속고 속이는 게임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다. 일은 뭣같이 힘들다. 일은 원래 그렇다. 사람들은 변하고, 장난치고, 서로 마음을 죽여가며 살아가고 있다. 내 생명력의 기원은 대체 무엇인가. 난 왜 이 새 아침에 일어나서 또 글을 쓰고 있을까. 뭘 기대하는 걸까. 소설 <스토너> 마지막에 주인공의 독백이 있다. "난 그동안 무엇을 기대했나." 기대 없이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기대한 것들이 좌절되어도 난 또 기대할 것이다. 기대하고 좌절하고 그걸 무한 반복해도 난 "난 그동안 무엇을 기대했나." 하고 소회하지 않을 것이다. 난 또 분명 눈을 반짝거리며 세상 신기한 것들을 찾아나서겠지. 그렇게 늙고 싶다. 항상 반짝거리면서. 항상 팔랑거리면서.
오늘도 눈을 반짝 뜬다.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세상을 둘러본다.
비루할 때가 있어도, 지난할 때가 있어도,
나는 또 일어날 것이다.
내 주문이다.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