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필시 먹고 자고 싸고 해야 사는 존재다. 그 번거로운 짓을 매일 반복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AI가 발전한다고 해도 이 사람의 세 가지 푸닥거리들을 전부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은 외롭고, 쉽게 슬퍼지고, 쉽게 행복해지고, 쉽게 변한다. 어떤 것들은 때려죽여도 안 변한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어제는 간호조무사 보수교육 듣느라 거의 6시간을 컴퓨터 앞에 붙어 있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그것만 해도 눈치없이 배가 고파 오는 게 아닌가. 난 편의점에 가서 라면을 먹었다. 배고픔이 해소되니 뭐라도 할 것 같았지만 이내 심심해졌다. 인간의 권태, 이것만큼 답없는 것도 없다. 권태는 사람이 해결해 줄 수도 없다. 권태는 일견 고독과 비슷한 결을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하지만 애써 나는 그걸 권태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이겨냈다. 정확히 이겨냈다기보다는 그냥 잤다. 잠으로 회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때로는.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서는 아직 멀었다. 쨍한 여름을 좋아한다. 습하고 더운 것도 좋아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어쩌나, 올해도 6월은 다가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 레드벨벳이 그랬듯 내 안으로 새로운 계절이 불어온다. 월요일 날 약속 하나 빼고는 아무 일정도 없이 계속 집에 있었다. 밀린 드라마도 보고 하려고 했는데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아 멍하니 생각만 했다. 새로 간 직장에서 또라이 같은 사수가 있으면 어쩌지, 원장이 또라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해보고, 출퇴근 시간이 지금보다 아무래도 길어질 텐데 내가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제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데 엄마는 "이제 너나 나나 알아서 잘 살고 서로 피해 주지 말자" 하는 말을 들었다. 엄마는 어느 정도 나에게로부터 케어받는 삶을 포기하신 듯 보였다. 물론, 나를 평생 키워준 부모의 노년을 걱정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지만 난 엄마 아빠를 모시고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엄마 아빠도 그걸 바라고 계신 것은 아닐 것이다. 저 말은 그냥 "니 인생이나 똑바로 살아라" 하는 소리로 들렸다. 맞는 말이다. 너나 잘하세요.
오퀘스타 아라곤의 정규를 들으며 글을 쓴다. 작년에 보라카이에 다녀오고서는 굉장히 실망했다. 해외여행이 원래 이렇게 재미없었나 싶었다. 더이상 새로운 게 없었다. 다음 해외여행은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작년 여행과 같은 경우라면 안 갈 것 같다. 다음에는 꼭 혼자 가봐야겠다. 딱히 별로 맞지 않는 지인과 같이 갔더니 피곤하기만 하고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까지 가서 도스토예프스키 생가나 보고 오고 싶다. 가서 러시아어로 된 죄와 벌 한 권도 사고, 거리를 둘러보고 싶다. 이제 일하게 되면 그만한 시간이 절대 안 나겠지만, 기회를 노려본다. 난 그냥저냥 해외여행을 좀 다녀온 편인데, 그냥 지금으로서는 좋았던 해외여행을 추억하며 현생을 사는 게 더 좋다. 오퀘스타 아라곤의 음악은 쿠바 여행을 다녀오면서 알게 되었다. 정말 느릿하고 여유로운 음악. 그 시절, 젊고 창창했던 육신을 이끌고 쿠바까지 가서 여행하고 다녀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지상천국이었다. 쿠바는.
40대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사실. 몸은 점점 더 늙어가고 정신은 아직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고, 이 역설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그래, 뭐, 42살인데 뭐 어쩌라고. 30대가 시작될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같은데, 40대는 확실히 다르다. 내 인생에 급격한 변화가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이제 나는 시작인데, 뭔가 늦은 것 같기도 하고, 요상하다. 흰머리는 점점 더 늘어나고 피부 탄력은 줄어든다.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한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빠꼼해지기도 했고, 어떤 점에서는 더 멍청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어색한, 중간에 낀 듯한 나이를 견디려면 일상이 단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견고한 일상에서 나오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힘으로 하루하루 버텨 보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뭔가 이상한 쪽으로 빠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다. 삐끗하면 인생 나락 갈 것 같은 그런 느낌. 진짜 정신 차려야지.
살아서 지구를 나가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확실히 죽는다. 창백한 푸른 점에 모여 사는 먼지들. 우리. 우리들. 아침이 되자 또 똥을 누고, 배가 고프다. 잠을 자고 일어났다. 이 지리해 보이는 일상을 나는 몇백 번 반복해야 한다. 권태가 오지 않도록 나는 정신줄을 꽉 붙잡고 있어야 한다. 차라리 고독해지도록. 차라리 높고 깊은 고독에 빠지도록. 난 며칠 동안 씻지 않아 머리가 간지럽다. 내일은 고모랑 강남역에서 약속이 있고, 내일모레는 고등학교 동창과 강남역에서 약속이 있다. (강남역이 지하철로 제일 가까워서) 난 다시금 "경기도 모 시로의 전입을 환영합니다"라는 문자를 바라본다.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의 감정을 나는 기억해 내야만 한다. 뭣도 없이 모텔을 전전하다가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의 막막함. 취업도 되지 않고 돈은 없던, 그 밑도 끝도 알 수 없던 시절을 기억해 내야 한다.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기억 못한다고 난 벌써 잊은 것인가. 집을 나와서 불안하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때를. 한편으로는 엄마집에서 살던 그때가 편안했던 것임을. 하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다. 절대로. 사실 명절때도 내려가기 싫다. 영원히 안 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되도록이면 엄마 아빠를 보고 싶지 않다. 그냥 생존 신고만 하고 서로 살았으면 좋겠다. 불효녀라고 해도, 뭐, 이미 불효녀인데 어쩔 거야. 이혼하면서 온갖 불효란 불효는 다 저질렀는데, 이제 와서. 몇 년 뒤면 엄마 아빠도 칠순이다. 가족식사, 뭐 그런 걸 해야겠지. 그때는 내가 직장이 안정되고 부디 삶이 많이 정돈된 형태였으면 한다.
사람의 푸닥거리란 이토록 정신없는 것이다. 이토록 신경 쓸 게 많은 것이다. 한 끼만 안 먹어도 배고프고, 못 싸면 힘들고, 하루라도 잠을 설치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연약하디 연약한 인간이란 존재. 조울증 환우라 정신건강의학과를 20년 넘게 다녔으면서 이제는 그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을 하게 된 간호조무사 최미야. 새로운 인생의 시작. 친구가 그랬다. 내 자신이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주문을 외지 않으면 살기 힘들다고. 나도 공감했다. 이 비루한 일상과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도, 나 자신이 특별했고, 앞으로도 특별한 존재일 거라는 믿음을 굳건히 가질 것. 그 주문. 주술같은 주문을 오늘도 외워 본다.
난 나라서 행복해.
난 빛이 나.
내가 나다워서 아름다워.
내가 나라서 다행이야.
널 정말 좋아해, 널.
좋아하는 나 자신, 오늘도 힘내자.
누구에게도 사랑을 구걸하지 마.
그 사랑은 너 스스로도 충분히 만들 수가 있어.
너 스스로에게 충분히 줄 수 있는 사랑이니까.
걱정하지 마.
갈 수 있어.
할 수 있어.
사랑한다, 내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