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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Mar 16. 2022

싱글맘. 조울증. 이혼인. 자유.

이혼녀라고 쓰려고 했다가 지웠다. 단어에 '녀' 자가 붙는 데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내 매번 같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아 보인다면 당신의 판단이 맞다. 나는 싱글맘에 조울증을 앓고 있는 이혼인이다. 이게 내 생활의 대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당분간 사로잡혀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왜 뒤에 자유를 붙였을까. 당연한 말을.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의 배변훈련 때문에 오줌에 젖은 이불을 세탁기 통에 넣으면서 생각한다. 자유롭고 싶다고. 하원시간 직전에 담배를 급하게 피우면서 생각한다. 자유롭고 싶다고.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겨놓고 잠시 피신해 온 집에서 나는 글을 쓰며 생각한다. 자유롭고 싶다고.


나는 싱글맘이다. 아이를 혼자 키운다. 반은 뻥이다. 조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내 딸아이의 조부모님들, 그러니까 내 부모님들은 손주 걱정에 매일 절절 맨다. 금지옥엽으로 혹여나 잘못될까, 엇나갈까, 사랑을 퍼부어 주고 계신다. 주말이면 바닷가로 데려가고 평일에 시간이 되실 때는 최선을 다해 먹이고 입히고 놀아주신다. 조울증을 앓고 있는 딸이 혹여나 손주를 방치하거나 실수하는 건 없는지 꼼꼼히 체크한다. 나는 그게 가끔은 숨막히지만 자주 고맙다. 나 자신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지 않으면, 그러니까 내 부모라도 없으면 스러져 버릴 걸 알아서 그러는 걸까. 비빌 언덕에 누워 나는 이 태평한 시간들을 누리는 걸까.


나는 조울증이다. 혈압약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는다. 전에 약을 먹지 않는 실험을 하고 큰 낭패를 보고 나서야 나는 약을 잘 챙겨먹기로 했다. 날씨가 좋아지고 내 몸에 에너지가 돋아나니 조증 삽화가 왔다. 다행히 약으로 누르고 있어서 간당간당한 선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내 부모 덕이 크다. 나는 대체 부모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회의감도 아이를 보면 잦아든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엄청난 힘이 든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가 들어서, 가끔 내 내장이 다 쏟아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제는 아이와 엄마와 산책을 하는데 오른쪽으로 기울다가 쓰러질 뻔했다. 빌어먹을 공황장애 증상이다.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것. 오른쪽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큰 병원에서 검사란 검사는 다 해봤지만 원인불명. 조울증과 공황장애 약을 먹고 나서야 호전이 되었다. 약은 꼭 챙겨 먹어야 하는 것이다. 약은, 꼭, 챙겨, 먹어야, 하는, 것이다, 하고 매일마다 되뇐다.


나는 이혼인이다. 가정 불화, 성격 차이로 이혼을 했다. 전 남편은 면접 교섭에 아주 성실하게 응한다. 우리는 종종 카톡을 나눈다. 아이의 건강이나 정서 상태에 대해서도 의논을 한다. 그것뿐이다. 나는 전 남편을 아이의 아빠로서만 대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게 잘 기능하는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밥을 먹을 때, 아이의 기저귀를 갈면서 멍하니 뽀로로를 볼 때, 나는 그와 언젠가 갔었던 장소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먹었던 밥이나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나, 우리가 같이 보았던 영화를 떠올린다. 그는 그뿐이다. 언젠가 나 자신의 영역으로 한없이 끌어당겼던 그가, 내 안에서 뿌리채 뽑혔다 하더라도 잔가지는 남아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환영들은 다만 잔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잔가지는 썩어버리고 새롭고 싱싱한 흙사이로 지렁이가 오가며 새싹이 움틀 것이다.


나는 결국 희망을 노래하는 한 마리의 종달새이고 싶다. 그 종달새는 얼마 전 지금 사는 집보다 더 커다란 집을 하나 샀다. 나는 문을 닫는다. 종달새는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다. 눈은 앞을 보지 못하고 귀는 현재를 듣지 못하고 입은 굳게 닫혀 있다. 나는 자진해서 새장의 문을 닫은 종달새이다. 그러나 자유를 꿈꾼다. 훌훌 떠나버리는 자유든, 지금 여기서의 자유든 뭐든 나는 내 몸보다 비대해지길 원한다. 날개가 커지고 커져서 창밖으로 삐져나올 때까지 웅크리고 있을 작정이다. 입은 닫혀 있지만 목소리에서 구르는 허밍까지는 막을 수 없다. 조금씩 희망을 노래한다. 자유를 갈구한다. 아침에 눈을 떠서 아이가 내 머리채를 잡아채며 일어나라고 수없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빵조각과 물 한 모금을 먹여 어린이집에 보내고, 하루종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하원시간이 되면 좀비처럼 아이를 맞으러 가고, 할머니집에서 노는 아이를 뻥 뚫린 시선으로 마주하고, 돌아다니는 아이의 입에 생선과 밥과 야채를 집어넣어주고, 저녁이 되어 똥을 싸면 맨손으로 똥을 씻어낸 후 기저귀를 갈아주고, 양치를 시키고, 재운다. 내가 걷고, 내가 마시고, 내가 울고, 내가 보고, 내가 나를 본다. 그 사이에 자유가 끼어들 틈은 아주 좁다. 그래도 나는 희미한 형상이든 분명히 보려고 머리를 뒤흔든다. 침을 꿀꺽 삼킨다. 밤하늘의 달을 보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에게 "달님이 예쁘지" 하고 웃어준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영신이 깃들길 바란다. 영신이라는 건 어째 뜬구름 같은 것. 그렇지만 꿈꿀 수는 있는 것. 자유도 똑같다. 조울증을 앓고 있는 이혼인인 싱글맘인 나는, 조금 있다가 아이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러 가야 한다.


나는 갇혀 있지만 자유롭고 싶다. 나는 닫혀 있지만 열려 있고 싶다. 언제나 그렇듯 뼛속까지 젖을 정도로 비를 맞고 싶다. 돈을 제때 벌지 못하는, 조울증을 앓는, 이혼한, 싱글맘인 나는 단 한 번의 숨이라도 제대로 들이마시고 내뱉고 싶다. 낡아 가는 내 거죽을 쓸어담아 오늘도 나는 내가 된다. 얼굴을 팡팡 쳐 본다. 욕지거리도 한번 내뱉어 본다. 종달새의 날개는 창밖을 뚫을 만큼 커질 수 있을까. 방문을 열어젖히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하늘을 가를 수 있을까.


오늘은 꼭 아이가 변기에 똥을 누었으면 하는 바람.

오늘은 꼭 아이가 돌아다니지 않고 제자리에서 밥을 먹었으면 하는 바람.

멍청아, 너는 지금 네 아이와 같이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아 줬으면 해, 하고 외치는 내 목소리.

멍청아, 너는 지금 끝간데없이 살아 있다고.

멍청아. 너는 지금 살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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