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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y May 31. 2024

도미니언(2020) -톰 홀랜드-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의 패권적 문화체제가 되었을까?

추천자, 발제자, 진행자 : 송윤근

독서토론도서 : 도미니언 _ 톰 홀랜드

참석자 : 타이티, 박선희, 미써니, 무우우니, 송윤근 5명


이번 독서토론에서는 명확한 발제에 대한 의견 공유의 형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책은 세계사를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고, 기독교의 몰랐던 내용들을 알게 되어서 재미있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지난번 에리히 포럼의 "사랑의 기술"에서 인용을 많이 해서, 책 간의 가로 세로 읽기가 이어지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종교가 개인의 존재론적 고독과 불안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작된 것 같다는 말씀에 공감도 가지만, 모임의 구성원 중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없어서, 기독교 쪽의 생각을 공유할 수 없었다는 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노예제에 대한 찬/반 양쪽이 모두 종교에서 명분을 찾는 사례를 통해서 종교를 명분을 찾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 정치적 입맛에 맞게 활용하지만, 선택의 기본 동기가 경제원리인 이익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의견에 대해서 한편 공감하면서도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다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졌다가 가족과의 연결에서 벗어나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의 개인적 종교 경험도 얘기에서 나와서 흥미로웠습니다.


1. 저자는 서구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상당히 폭넓은 합의"는 대체로 기독교의 가르침과 전제 조건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하면 기독교가 서구의 가장 강력한 패권적 문화체제가 되지 못했다면 지금의 도덕체계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주장이다. 


2.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은 자연에서 나온 보편적인 인간성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나온 환상, 하라리 식으로 말하면 허구(fiction)이지 않을까?


=> 1, 2번에 대한 의견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에 기반한 서양의 도덕체계가 서양에 유일한 듯이 얘기했지만, 우리는 중국의 유교, 인도의 불교, 기타 다른 종교에서도 기독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가르침이 있어왔으므로, 기독교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도덕체계와 비슷한 가르침은 가능했을 것이라는데 동의했습니다.


3. 니체의 주장: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단일한 도덕은 있을 수 없으며, 강인하고 정력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을 위한 도덕과 허약하고 평함하고 복종적인 사람을 위한 도덕,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기독교는 연민, 복종심, 겸손함 등을 가르치기 때문에 전자인 노예의 도덕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투쟁적이고 쾌락 지향적인 정신을 다시 소생시켜야 한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 마태복음 20:16

"남의 종이 된 사람들이여, 모든 일에 있어서 이 땅의 주인들에게 순종하십시오." - 골로새서 3:22


=> 이 주제에 대해서 대한민국 교육계의 하향 평준화를 예시로 들면서 공감해 줬습니다. 인본주의, 과학기술의 발달, 진화론이 대두되는 시기에서 인간의 진화적인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투쟁적이고 쾌락 지향적인 정신을 다시 소생시켜야 한다는 점에 일정 부분 동의했습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는 말에 대한 의견에 성경에서의 오전에 온 사람과 오후에 온 사람의 동일성이 예시로 나왔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례였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책의 후반에 나오는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말은 기독교가 약자에 대한 배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종교로서 현재의 고통과 고난이 천국에서는 더 나은 보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4. 탈북자들은 한국의 교회를 경험해 보고 형식, 상징, 분위기 등이 마치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와 닮았다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북한에서 자기비판과 상호비판은 매우 성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는데 예배에서 죄인이라고 부르며 회개하라고 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성경 말씀을 읽고 행하는 것 역시 김일성 교시를 읽고 그랬던 것과 같다.  하나님은 신이고, 김일성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구분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김일성을 신과 같이 배워온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배울 때 김일성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북한은 사실상 김씨일가를 숭배하는 일신교 국가다.


=> 이 내용은 처음 듣기는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이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와 닮았다는 내용은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4. 기독교와 유대교는 구약성경을 공유하는 서로 유사한 종교입니다. 역사적으로 그토록 유대인들이 기독교 사회로부터 탄압받은 이유를 무엇일까?


=> 이에 대한 답으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유대인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명확하게 유대인의 책임을 찾을 수 없다는 의견도 있어서, 무엇이 사실인지는 알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책에서는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낀다라는 문장을 봤던 것 같지만, 몇 페이지인지 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역사는 흘러가면, 정확한 사실을 알기는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5. 예수를 고문하여 죽인 로마제국은 마침내 예수를 하느님으로 숭배하는 제국이 되었다. 무엇이 기독교를 서구사회에서 이처럼 패권적이면서 파괴적인 종교로 만들었나?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어서 무엇이 사실이다고 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하지만, 명확히 한 가지를 원인이고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바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로마제국이 국가 통치에 가장 적합한 철학과 종교를 찾다가 기독교의 가르침이 나라를 통치하고 국민을 다스리기에 가장 적합한 사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국교로 받아들였고, 그 이후 통치자들과 교황청의 협조로 인해서 서구사회의 주도적인 도덕 및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 것이 아닐까 협의하였습니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인들의 스스로의 처신을 조심하는 생활태도가 성적으로 문란했던 당시의 로마사회에서 독특하게 인식되었고, 권력자들은 부인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얘기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결국, 어머니들에 의해서 상류계층의 의식체계가 바뀌어 갔던 것이라 추측됩니다.



6. 16세기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시작은 마르틴 루터 개인과 바티칸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로마교황청과의 싸움이었다. 승산 없는 게임으로 보였지만 결국 성공했다. 왜 하필 16세기였을까? 14, 15세기였다면 불가능했을까?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 발제자님의 정해진 답이 있었던 것이 좋았고, 그 답이 타당성이 높아서 더 좋았습니다.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잊어먹고 있던 답이어서 더 재밌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이 로마교황청과의 싸움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오랫동안 기득권 세력으로서 쌓여왔던 로마교황청의 부패가 1순위이고 이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소통시킬 수 있는 인쇄혁명이었다는 점에 모두 공감했습니다.


7.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 유럽국가가 참전한 "30년 전쟁"의 종결로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는 무엇인가?

8. 1309 ~ 1376년 사이에 7명의 교황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거주해야만 했던 "아비뇽 유수"와 아비뇽 유수가 종료된 직후에 로마와 아비뇽에 두 개의 합법적인 교황청과 두 명의 정통 교황이 존재하게 되면서 서방교회가 분열하고 서유럽 전역에 걸쳐 대혼란이 펼쳐졌던 사건인 "서방 교회 대분열 (Wetern Schism)"

9. 1077년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Walk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


7~9번까지의 내용은 송윤근 님이 도표로 만들어서 보여주면서 강의해 주셔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주제로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한다는 측면에서 이번 토론은 독특한 면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2500년의 역사를 다루는 책을 한번 읽고 기억할 수 있는 양적, 질적 한계가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서양의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의 역할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관점에서의 세계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즐겁고 재미있었습니다.


독서모임에서의 여러 회원님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책을 읽고 싶은 동기부여를 받게 됩니다. 다음에 또 다른 책으로 만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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