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운명론적 존재인가? 자유로운 존재인가?
뇌과학과 관련해서 많은 저서들이 있는데, 영국의 떠오르는 스타과학자인 한나 크리츨로우의 '운명의 과학( =The science of fate)'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주제는 명확하다.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믿고 하는 행동의 많은 부분이 실질적으로는 이미 뇌과학적으로 설계된 회로에 따른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행동에 자유의지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감정, 기쁨의 감정, 식습관 등이 내가 태어나기 전의 부모와 조부모의 생활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는 것을 과학적 실험으로 증명한다. 이 책의 제목이 "운명의 과학"이라고 써진 이유가 우리의 많은 부분이 이미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과학계의 대척되는 큰 화두 중의 하나가 우성과 열성으로 구별되는 인간의 우열이 있다 VS 없다에 대한 논쟁이라고 들었다. 골턴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주장했던 우성론에 의해서, 또는 진화론이라는 언어의 뉘앙스에서 나타나는 더 나은 쪽으로의 발전이라는 인식은 인종을 또는 사람들을 서열메기고 싶게 만들고, 열등한 인종과 사람들에 대한 당연한 운명이라는 당위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서 생각해 보면,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부족이 국가로 발전하면서 계급이 나눠지게 되었다. 더 쉬운 일을 하면서 더 많은 자원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직위를 만들고, 계층을 만들어서 착취를 정당화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주장에 반박하기 어렵다.
계급이 나눠지게 되었을 때, 착취를 하는 사람들이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교였고, 왕은 신의 아들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종교의 믿음이 이성과 과학으로 부정당했을 때, 종교를 대체하는 현대의 과학은 진화론의 우성론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착취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 우성론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한 홀로코스트와 자유주의 시민 사상의 우대로 우성론은 금지어에 가깝게 되었다.
스티븐 핑커의 빈서판에서 이와 같은 우성론에 대한 학자들의 기피로 인해서 실질적인 사람들 간의 차이를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는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좋은 욕구와 습관과 뇌회로를 가질 수 있고, 그 뇌회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 같다. 이러한 뇌회로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과학적 진실과 그로 인해 새겨진 뇌회로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인적 노력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개개인의 습관을 깨뜨리려면 인내심과 함께 자아성찰, 그리고 타인과 소통하고 타인에 연민을 느끼는 능력도 필요하다. (P327)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었던 더 큰 위안은 개개인이 이 세계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나는 수없이 많은 유전자 발현의 경우의 수와 자라게 되는 환경의 경우의 수와 나 스스로 나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경우의 수와 실패와 성공의 경우의 수를 곱한 확률의 하나인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와 똑같은 사람이 태어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할 것이라는 확신을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었다.
생명이 어렵고 귀중하고, 나라는 의식을 가진 나라는 생명은 나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귀하다. 이런 귀한 나 자신을 내가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에서 태어난 나 자신에게 못할 짓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의 운명은 많이 정해져 있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과학적 운명의 영역을 벗어 난 자유의지의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나의 삶과 나와 연결된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