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한적하고 평화로운
오늘 아침에 유투브를 통해서 좋은 클래식곡 10곡을 추천해주는 영상을 알게되었다. 나하고는 너무 딱 맞는 음악들이라서 이웃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JdrR0sBSo&feature=youtu.be
나는 책 읽을 때 아무 소리가 안 들리는 것이 좋은데, 이 음악은 책읽기가 너무 편해서 좋았다. 사이사이 왠지 많이 들어봤던 음률도 나오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쓴 글에 누군가가 답글을 달았다. 글에 대한 답글은 항상 기쁘다. 그것도 확실히 읽었다는 표가 나는 답글은 내 글을 읽기 위해서 시간을 내 주셨다는 것이기에 더 감사하다. 답글의 내용은 벌써 주말이 다 지나갔다는 내용과 함께 남은 일요일도 잘 쉬라는 내용이었다. 따뜻한 답글이었고, 그 답글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노래가사가 있어서 대댓글을 남겼다.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 아쉬움이 쌓이는 소리, 내 마음 무거워지는 소리...." 누가 불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일요일의 말미가 되면 떠오르던 노래였는데, 답글을 달면서 가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1990년대 민중가요로 많이 불렸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직장인들에게는 주말이라는 것이 휴식이고 안식이다. 그 안식이 끝나고 다시 회사를 나가면, 생활비를 벌기위한 생계노동을 시작하게 된다. 항상, 경제적 자유를 얻어서 직장은 자아실현을 위해서 취미처럼 다니기를 원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월급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끊을 수 없는 힘겨운 일터로 줄지어서 출근한다. 그래서, 저 노래는 더 공감이 가는 것 같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12월 성과급 사건이 기억속에서 희미해져가고, 분노는 사그라들고, 열정도 식어갈 때쯤이다. 다행히, 12월에 시작한 책읽기와 글쓰기는 끊이지않고 수행하고 있다. 역행자에 나왔던 22전략 글읽고 글쓰기 하루에 2시간은 초과달성하고 있다. 점점 말만 많아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름 계속 생각하고 나의 행동을 점검할 수 있는 시간들이 주어지면서 조금씩은 앞으로 이동하는 것 같아서 좋다.
예전에는 금요일 저녁이 제일 좋다고 했는데, 요즘은 일요일 오전시간도 좋다. 일요일 오전 약 3시간은 혼자 있는 경우가 많다. 한주동안 있었던 일들도 생각이 나고, 다음주에 해야할 일도 확인하면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기도 하고,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러다 저녁이 되면 다시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가 생각이 날 것 같다.
어제 적었던 "자그마한 오두막"이라는 글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의 평안을 주는 심상이미지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만은 좋다. 내 마음 속에 자그마한 오두막을 짓기 시작했다. 그 마음의 평안의 공간을 조금 더 꾸미고, 불편한 마음이 생길 때는 그 오두막에서 잠시 쉬다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현실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내가 보고, 만지고, 맛보고, 듣고, 느끼고, 향기맡는 세상과 내 머릿 속에서 뇌가 만들어 놓은 세상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설득되었다. 내 뇌는 나의 신체신호와 외부입력 자극들 모두를 압축하고 추출하여 해석한 형태로 저장한다. 내가 본 것과 실재는 완벽히 똑같지 않으며, 내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세상은 실재하는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새롭게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해석하는 방식을 달리하면 모든 세상이 새롭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정보를 받아들여서 우리의 생존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자원을 배분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여 몸을 준비시킨다. 우리의 외부환경은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고, 변하는 세상속에서 우리의 자원배분과 미래예측은 경험을 통해서 수정되고 재해석된다. 예전에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리 몸의 세포는 최대 2주를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2주에 한번씩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단지, 우리의 몸은 한정된 자원사용을 최소로 하기 위해서 항상 하던데로 자원을 배분하기 때문에 우리의 변화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매시간, 매분, 매초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을 비교하며 세상을 예측하는 시스템을 변형하면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 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이 주어져 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런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 이후 나에게는 내가 변할 방향에 대한 결정권이 주어져 있었다. 그 결정권을 "경로의존성"에 따라서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해왔다. 이 결정권이 환경에, 유전자에, 회사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는 자유의 시작이다.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감금당한 사람도 그 결정권을 포기 당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는 그 결정권을 내 스스로 한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결정권의 일부를 사용해서 나는 내 마음속에 자그마한 오두막을 짓겠다. 내 평안과 안식의 오두막, 언제든지 가서 쉬고 재충전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서 조금씩 더 예쁘게 꾸며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