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

<다정하고 작은 이야기>

by 정문향


일상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만들어가며 살아가지만 실은 어디까지나 우리 모두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들이다. 때로는 배려라는 명목으로 그럭저럭 양보하며 유연한 태도를 취하겠지만 이마저도 따지고 보면 무의식 속 어딘가 자신을 위한 마음이 분명 존재한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거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 선택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으면서 어물쩍 타인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에 대해 무뎌지고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좋은 게 좋은 거 지하며 허락하게 된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타인이 먼저인가. 내가 먼저 인가. 어쩌면 누군가의 일상에는 좀 더 많은 타인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모든 것에 혹여 내 잘못은 아닌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았나, 그들이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배려라고 하는 행동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타인을 위한 수십 가지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정작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배려와 양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은 내가 예상했던 만큼 파급력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상대방이 고맙게 받아들인다고 해도 배려라는 본질에 어긋난다. 어디까지나 기대심리가 철저히 배제된 배려와 양보만이 타인들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법이다. 살면서 배려와 양보를 하면서 어떠한 이유로든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했다면 배려라는 밑바닥에 실은 자신을 위한 약간의 이기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대심리가 완전히 제외된 완벽한 배려와 양보가 아니라면 굳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타인에게 맞춰갈 필요가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맞춰간다는 것은 조금씩 본인의 정체성을 갉아먹는 일이다. 삶은 아쉬운 대로 참고 견뎌야 하는 것도 아니고 타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견뎌야 하는 것들이 많을수록 삶은 더 초라해지고 행복은 반대로 멀어진다. 선함에도 정도가 있듯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에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정도의 경계는 내가 배려와 양보라는 명목을 붙이지 않고도 불편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지 않을까.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타인이 어떻게 평가하든 크게 중요치 않다. 타인은 완벽한 타인으로 남을 때 서로 존중하는 거리감으로 관계가 잘 유지된다. 적절한 거리감은 타인의 입맛에 맞게 자신에게 없던 모습을 만들어내거나 맞지도 않은 가치관을 아쉬운 대로 '척'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상처를 받았던 사람은 적절한 거리감을 넘어서고 싶었던 타인이거나 잘 보이고 싶거나 칭찬을 받고 싶거나 자신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완벽한 타인이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어쩌면 이상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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