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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실리 가는 길

덩굴 라일락 향기를 찾아서-#6. 에로스와 타나토스

by 시를아는아이

“베네치아는 이런 곳이었다. 아양을 떠는 수상쩍은 미녀 같은 이 도시는 어떻게 보면 동화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나그네를 옭아매는 덫 같기도 했다.”

_T.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1.

베네치아 이야기를 더 해 볼까요? 문학이나 영화, 예술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도시들은 어쩐지 다들 한 번씩 갔다 온(?) 듯한 착각을 주죠?

파리나 뉴욕을 생각해 봐요. 누구나 한두 곳 가고 싶은 장소를 댈 수 있을 만큼 이 도시들은 우리에게 머나먼 물리적 거리에 비해 너무 친숙하죠.


2.

최근 몇 해 동안 제게 베네치아가 그랬던 건 무엇보다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12) 때문이었어요.

뒷면지에 습관대로 표시한 서명과 구입 날짜를 보면 이 책을 산 지 10년이 넘었고, 그동안 그 책 속의 저 작품을 간격을 두고 서너 번 넘게 읽은 듯해요. 비교적 짧은 중편소설이라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몇몇 시집이나 에세이를 제외하고 이렇게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읽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아무튼 이 작품은 제목처럼, 구스타프 에센바흐라는 독일의 저명한 작가가 휴양을 위해 방문한 베네치아에서 남몰래 어느 미소년(타치오)을 향한 치명적 사랑에 빠져서 콜레라가 창궐하는 그 도시를 떠나지 못하다가, 결국 그곳에서 죽음에 이르고 만다는 이야기에요.


3.

어떤 때 사랑의 충동(에로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타나토스)보다 더 클 수 있죠. 아니 두 가지는 삶을 구성하는 강렬한 두 얼굴(야누스), 어쩌면 결국 한 몸인지도 몰라요. 더 깊이 들어가면 저도 잘 모르는 프로이트나 정신 분석 이야기를 해야 할 떼니까 겸손하게(?) 여기서 멈출게요.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과장하거나 왜곡하기 쉬우니까요.


4.

그보다 제가 왜 ’진‘에게 ‘궤도를 벗어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이 어두운 작품을 이야기하는지 말해야 할 것 같아요… .

이 소설에서 에센바흐가 타치오를 처음으로 그리고 이후 자연스럽게 훔쳐볼 수 있는 공간이 호텔의 ‘식당’이에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가 점심 시간에 이곳 구내 식당을 갈 때마다 자꾸 그 장면이 떠올랐어요.


5.

굳이 여러 사람한테 말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제가 갑자기 부서를 옮긴 무렵부터 한동안 점심 시간이 특별히 불편했어요.

아예 회사를 옮긴 것도 아니고, 서로 불편한 관계를 완전히 마무리짓지도 못하고 구름다리(?) 하나 건너 황급히 자리를 옮기고 보니, 점심 시간에는 어쩔 수 없이 그중 몇몇 분들의 얼굴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또, 새로운 부서에 갑자기 ’섬‘처럼 앉아있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 특히 저 안쪽의 시끄러운(?)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죠. 제 언어로 ’고인물들‘ 혹은 ’내부자들’이라고 부르는… . 어쩌면 오히려 <노팅힐>(1999) 같은 영국 영화에 나오는, 조금 덜 떨어진(?) 듯하지만 인간미는 있는 친구들 같기도 해요. 시간이 꽤 흐른 지금은 한결 나아졌지만, 지금도 그쪽의 대화 스타일이나 묘하게 감도는 저들만의 폐쇄적 아우라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답니다.

제가 조금 더 젊었다면 어쩌면 아예 회사를 옮기거나, 또는 합정이나 종로 같은 서울 도심에 있는 회사였다면 아예 혼밥이라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잘 아시는 것처럼 포기하기 힘든(?) 공짜 점심을 제공하는, 고립된 섬 같은 출판도시에 있는 회사라… .


6.

어쩌면 ‘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인지도 모르겠어요. 에센바흐가 자기도 모르게 타치오를 관찰하듯이, 진의 큰 키와 하얀 얼굴, 고요한 분위기가 눈에 자꾸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말없는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 .


7.

점심 시간마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혼밥을 위해 회사 식당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진’과 우연히 마주치거나 비록 살짝 떨어진 자리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싶은, 두 마음이 자주 서로 싸웠어요.

어때요? 지금 제가 금지된 사랑에 빠져 위험한 베네치아를 맴도는 늙고 위태로운 저 작가의 모습과 닮았나요?


*생각해 보니, 작가의 대표작인 소설 <마의 산>에서 주인공 한스 카토르프가 러시안 여인 클라브디아 소샤에게 끌리기 시작하는 공간도 사촌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스위스 다보스의 베르크호프 국제 요양원의 식당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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