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 라일락 향기를 찾아서-#8. 엘비라
“엘비라의 아치를 통과해/네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싶다/네 이름을 알고/그리고 울기 시작하기 위해.”_F. 가르시아 로르카/<아침 시장의 노래>
1.
10여 년 전부터 퇴근길에 커피숍에 들러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하루를 정리한 후에 집으로 가는 습관이 생겼어요.
마을 도서관을 다니면서 첫 책을 쓰던 시절에는 집 근처 할리스 커피, 종로에 있는 회사를 다니던 무렵에는 청계천 옆 코나 퀸즈 커피, 그리고 최근에는 출판단지 라본느에서… .
족발집을 거쳐 지금은 무슨 카레집으로 바뀐 옛 할리스 커피 옆에는 뉘엇뉘엇 넘어가는 햇살을 받으면 앙증맞은 잎들이 자르르- 빛나던 느릅나무가 있어 좋았고, 코나 퀸즈 커피에서는 비 오는 날 청계천을 건너다 보며 글을 쓸 수 있어서 행복했었죠.
2.
그런데 개인적으로 여기 라본느가 조금 아쉬운 점은 수시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훤히 보이고, 반대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편안하게 숨을(?) 곳은 거의 없다는 점이에요. 금붕어도 몸을 숨길 물풀이 필요한데… . 그래서 가끔씩 길 건너 커피 빈에 가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그기는 자주 가기에 커피값이 부담… .
아무튼 라본느의 이런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일부러 맨 안쪽에 앉는데도 불구하고 종종 창밖으로 오가는 회사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훔쳐보게(?) 될 때가 있어요.
3.
그런데 그렇게 통유리창 너머로 우연히 지나가는 ‘진’의 모습을 본 적이 두어 번 있어요. 특히 처음으로 본 건 마침 ‘진’이 뒤늦게 여름휴가를 가기 전날 퇴근길이었어요.
뒤늦게 고백하지만, 휴가를 앞두고 설레었을 ‘진’과 달리 저는 그날이 상당히 힘들었어요. 일주일 동안 ‘진’의 모습을 먼빛으로라도 볼 수 없는데다가, 그런 괴로운 마음을 누구에게도, 심지어 ‘진’에게도 내비칠 수 없었으니까요… .
그날, 그런 답답하고 쓰라린 기분으로 라본느에서 하루를 정리하다가, 문득 눈을 들었는데 저 앞에 ‘진’이 파주 가는 버스 타는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요? 그리고 지나가는 듯하다가 폰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잠시 멈추더군요. 그 모습을 우연히 본 저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죠… . 이럴 때 사랑의 감정은 특히 심장이 약한 사람에게 위험해요.
5.
얼마전 둘이 함께 회의할 때 우연히 서로 사는 곳을 이야기하다가 제가
“과장님은 파주 사시죠?”
하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진’은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뭐라고 하기도 그래서인지 혼잣말처럼 천천히
“네, 파주 살아요… .”
하고 말하고 말더군요. 사실 그때 저는 속으로 ’아차!‘ 하는 생각에 진땀이 났었거든요.
6.
그리고 그 즈음 업무상 알게 된 ’진‘의 여름휴가 날짜를 앞두고 또 한 가지 제가 고민한 게 있어요.
이미 한참 전에 사내 그룹웨어 있는 ‘진’의 폰 번호를 일단 제 폰 메모장에 기록은 해 두었었는데, 감히(?) 연락처에 등록은 하지 못했었거든요. 아시는 것처럼 연락처 등록을 하면 카카오톡에 친구로 뜨고, 폰으로나마 부재 기간 동안 ’진‘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
하지만 결국 제 마음을 들킬까 봐 보류했었죠. 이것 또한 지나친 결백증일지 모르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제 연락처에 ‘진’이 없어요.
무엇보다 너무 어설프게 혹은 가볍게 제 소중한 마음을 드러내어 제게 찾아온 이 소중한 감정을 함부로 그르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뜻밖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타인에 대한 비밀스러운 감정을 섣부르게 세상에 드러내어 관계를 망치고는 하죠. 특히 일방적인 열정에 불타오르기 쉬운 젊은 시절에는… .
7.
그러나 그러기에는 제가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듯해요. 하지만 언제가 그 감정이 팽팽한 풍선처럼 너무 부풀어 올라 더 이상 감추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어요… .
뜬금없이 “사랑은 세상에 허용된 유일한 미친 짓”이라는 영화(<그녀(Her)>) 대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정말 그런 순간이 제게 올까요? 셀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