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 라일락 향기를 찾아서
#09번째 편지_심학산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_백석/<통영>
1.
지금까지 ‘진’은 회사를 다니면서 새벽에 눈뜨자 마자 그날 출근할 생각을 하며 설렜던 적이 있나요? 간혹 멋진 직장이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며 회사를 다니는 경우 그런 어처구니 없는(?)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런 날이 거의 없는 게 일반적인 직장인들일 거예요. 하지만 저는 처음 사회 생활 시작할 무렵 그처럼 가슴 뛰는 경험이 한 번 있었답니다.
2.
첫 직장이었던 그곳은, 조금 엉뚱하게도 성남에 있는 공단 지대에 있었어요. 본사는 서울에 있었지만 제가 발령받은 부서가 인쇄공장과 함께 구 성남 쪽에 있었거든요.
오랜 시간이 흘러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그 시절이 제게는 ‘제2의 사춘기’ 같았다는 생각을 해요.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까지 졸업한 20대 후반의 대한민국 남자에게 뜬금없이 사춘기라니?
하지만 실제 살아보니 어이없지만 어떨 때는 세상에 떠도는 말들이 맞더군요.
“겪어야 할 일은 언제든 반드시 한 번은 겪게 마련이다.”
또는 비속어가 들어가서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랄 총량의 법칙(?)’ 같은 종류의 말처럼… .
20대 내내 홀로 시인이나 번역가를 꿈꾸며 자기 세계에 갇혀 살던 아웃사이더가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회라는 까칠한 현실 세계에 던져졌다고 한번 생각해 봐요.
그래서 늘 사람은 불편했고, 업무는 서툴렀어요. 시간이 흘러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누군가 저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운 선배가 있어서, 조금 아프지만 정확하게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쉽지만, ** 씨는 이 회사와 편집일, 사람들과 안 맞는 것 같아요. 아직 젊을 때 미래를 위해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어때요?”
3.
그런데 그렇게 일과 사람에 부대끼며 사회 초년병 시절을 통과하던 무렵, 제게 한 사람이 눈에 조금씩 들어왔어요. 조판실에서, 구내식당에서, 점심 시간 공장 마당에서 남자들끼리 세팍타크로(족구의 일종)를 하던 회사 마당에서… .
그분은 조판실에 근무하던 여러 젊은 아가씨들 중 한 사람이었어요. 업무의 성격상 제가 속한 편집부 사람들과 접할 기회가 많은데다가, 조판실도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마주칠 일이 많았답니다. 무엇보다 한창 이성이나 연애, 결혼 등에 관심이 많을 청춘남녀들… . 또, 그 회사는 알고 보니 사내 커플이 심심찮게 나오는 분위기였죠. 아마 시내와 따로 뚝 떨어져서 단절된 주위 환경이 오히려 사람들을 서로 묶어 주고 친밀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던 듯해요.
4.
그 당시 저는 일을 하거나, 점심을 먹거나, 남자들끼지 함께 운동을 할 때도 본능적으로 그 아가씨의 모습을 먼저 찾았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출근하는 일이 즐거워졌고, 그 아가씨를 의식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조금씩 업무나 사람 관계도 좋아졌던 듯해요.
5.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무런 ’연애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단 한 번, 불타오르는 마음을 담아 진지하게 러브레터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도 받지 못했답니다. 허무하게 끝나는 짝사랑이 그렇듯이, 이상하게도 사랑이 시작될 때와 달리 끝날 때는 거의 기억나는 것이 없답니다… .
한 가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그 무렵 가끔씩 시를 쓰던 때라 그 아가씨를 생각하며 썼던 시가 한 편 가끔씩 흐릿하게 떠오르기는 해요.
“건너 숲이 흔들린다… 숲을 따라 내 마음도 흔들린다… ”
6.
마치 꼬리처럼 덧붙는 후일담처럼, 몇 년 후 우연히 그때 그 아가씨와 단짝처럼 지내던 다른 아가씨를 새로 옮긴 직장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과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슬쩍 그 러브레터 이야기를 물은 적 있어요.
뒤늦게 알고 보니, 당시 그 아가씨는 러브레터를 쓴 주인공이 제가 아닌 활발한 성격의 입사 동기 친구로 알았고 지금도 그럴 거라고 하더군요… .
아마 겉으로 조용한 제가 설마 그렇게 무모하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거 같아요. 뒤늦게 제가 썼다고 고백하기도 멋쩍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가고 말았죠… .
7.
그런데 제가 왜 한참 전에 이미 끝난, 아니 시작도 못한 허무한 ‘연애 사건’ 이야기를 지금 꺼집어 내고 있을까요?
우연히 ‘진‘이 조금씩 제 마음속으로 들어오면서 그때처럼 출근하는 일이 설레기 시작했어요, 정말 오랜만에! ’진‘ 있는 이 회사를 이루는 사람, 주변 환경, 공기까지 모두 새로운 빛깔을 띠기 시작했어요. 마법처럼, 사랑의 무대로 극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거죠.
8.
쉬는 날, 가끔 혼자 커피를 마시는 뒤편 베란다에서 멀리 보이는, 출판도시 곁에 묵묵히 서 있는 심학산을 바라보며, 문득 그곳으로 저도 모르게 달려가고 싶을 때가 있어요.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었다던 저 시인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