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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Apr 05. 2019

식탁 일기 - 모바일로 세계여행

feat. 허무함 주의

지난 삼일 동안 나는 다낭을 시작으로 하와이-> 조지아-> 영국-> 스페인-> 크로아티아를 다녀왔다. 삼일 만에 세상에? 가능해?  가능하다. 모바일 세계는 넓고, 빠르니까.


이 무모한 여행의 시작은 남편의 시크한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 마일리지 꽤 쌓였더라. 너네 다녀오고 싶은데 있으면 다녀와,”

오호라 잊고 있었던 마일리지가 꽤 쌓였구나. 어차피 남편은 바쁘다 했으니 우리 둘이 갈 곳을 찾아보자. 비행기도 공짜라 하니 우리 잠깐만 다녀올까 싶었던 것이다.

지지난해 난생처음 내 집 마련으로 분양을 받은 이후로 이제까지 우리 가족이 함께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 지 이년 째, 있지도 않은 돈을 다 끌어내 아파트 계약금을 마련하고 중도금 대출에 중간중간 확장비에 에어컨 값을 치르느라 우리 가족은 여행 갈 돈이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편도 계속 바쁜 일이 겹쳐 우리는 과거의 추억을 우려먹으며 다음 여행은 진짜 퍼펙트 한 어딘가로 다녀오리라 하고 마음먹은 지 이 년째. 딸애는 우리도 좀 어디 좀 가자고 징징 거렸지만 나는 당분간 해외는 갈 수 없으니, 올 겨울 이사 가고 나면 딸 애랑 가볍게 적당하고 기후 좋은 동남아에서 2-3주 있어볼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마일리지로 다녀오라고? 구미가 당길 수밖에.

 

처음엔 그냥 간단하게 “남들 다 가는 다낭에 우리도 가보자.” 사실 이제 여행 준비 이런 것도 귀찮으니 따뜻한 햇볕을 쬐며 풀빌라에서 칵테일이나 시켜 놓고 물놀이나 하고 오자 싶었다.

그리고 저녁 때는 시내에 나가서 구경도 좀 하고 어슬렁어슬렁 다니다 오자꾸나. 하고 정말 소박한 계획을 세웠다. 5월 말에서 6월쯤이 좋겠어하고 살펴보니 어머나 베트남은 우기구나. 뭐 비야 잠깐 오면 말 것이고, 아 그런데 그때 더위가 더위가.

문득 오 년 전 5월의 방콕이 떠올랐다. 한국의 찬란한 오월을 두고 떠난 5월의 방콕. 그때 아니면 자기는 못 쉴 거라며 남편이 제발 어디 좀 다녀오고 싶다고 해서 억지로 억지로 일주일 전에 표를 끊어 부랴부랴 다녀왔었지. 이상하게 비행기 값도 싸고, 초호화 호텔도 아름다운 가격이라 우리는 즐거웠으나 사람을 있는 데로 삶아서 다시 불에 굽는 듯한 방콕의 5월에 우리는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난생처음 겪어 보는 더위는 밤까지 계속되고, 그래도 난생처음 온 방콕에서 호텔에만 있을 수 없다는 나의 욕심에 그 더위에 왕궁, 동물원, 시장 뭐하나 빼놓지 않고 둘러보고 왔으니 동남아의 여름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일단 동남아는 여름엔 가지 말자. 진짜 오래간만에 가는 건데 우리 청명한 하늘과 내리쬐는 해, 산들바람이 완벽한 곳으로 찾아보기로 한다.


두 번째 목적지는 하와이. 

 딸애는 TV에서 나온 하와이를 보고 꿈의 여행지로 꼽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원한 파도와 하얀 백사장, 돌고래 바다거북과 함께 하는 수영, 맛있는 음식, 깨끗한 거리와 쇼핑 모든 것이 갖춰진 휴양지로 하와이만 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반 누구는 일 년에 하와이를 한 번 씩 간다며 엄청 부러워하던 딸과 함께 그래, 가자 하와이!

일단 마일리지를 탈탈 털어본다. 아~ 마일리지로 세 식구가 함께 가기엔 이만 마일 정도가 부족하구나, 둘이 가기도 살짝 부족. 그래도 요 정도면  어찌어찌해보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하나는 비행기표를 구매해도 되니까~ 하고 쿨 하게 하와이로 일단 정하고. 하와이 가서 오하우에만 있으면 안 되니 빅아일랜드와 마우이, 카우아이 중에 어느 섬을 방문할지 세상 심각한 고민을 한다. 빅아일랜드는 화산 지형, 용암 활동 중, 별이 쏟아지는 마우케니아, 바다 거북이와 수영, 코나 커피, 제일 큰 섬으로 렌트 필수 일주일 모자람, 마우이는 할레아칼라 일출, 휴양하기 좋은 섬, 카우아이는 그랜드캐년급 자연환경 정도로 요약해보니 어디 하나 빼놓을 데가 없네? 일생일대의 고민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완전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그래! 빅 아일랜드로 정했어. 하와이까지 가서 3박 5일 하고 올 수 없으니 최소 12일 이상으로 빅아일랜드 반, 오하우 반으로 하자고 혼자 결정. 여행 일수가 길어지니 숙박비가 좀 나오겠군 너무 비싼 데는 말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보자고 컴퓨터를 켰는데, 세상에, 하와이는 비행기 값만 싼 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많은 블로거와 여행객들이 다닌 와이키키의 그런 호텔들은 최고급이 아니어도 일단 30-40 만원 정도 가격이고, 그래 이 정도 불편함은 좀 참을 수 있지 싶은 곳도 20만 원 상당 거기에 주차비에 리조트 피까지 붙는다고 하니 숙박비가 엄청나구나. 유럽은 진짜 싼 거였어.  여기서 잠깐 멈칫, 충동적으로 다녀오기에 점점 가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오래 있으려면 렌트는 필수, 하와이엔 맛있는 것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먹기 좋아하는 우리 가족이 외식비 줄인다고 삼시세끼 밥 해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줄이고 줄여 액티비티 한 두 개라도 하고, 하와이까지 갔는데 쇼핑도 안 하고 그냥 오려면 억울해 죽을 것 같으니 정말 아끼고 아껴도 천만 원은 들겠네. 그런데 하와이까지 가서 아끼고 아끼고 싶지 않다. 다시 한번 이런 하와이 물가가 과연 타당한 것이냐 혼자 생각을 해본다. 지금 온갖 대출금 갚아대느라 현금 부족인 이 상황에서 또 빚을 내서 하와이에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한다. 아 나, 루트까지 다 생각해봤는데. 일단 하와이는 돈을 좀 모아서 가는 걸로 충동적으로 가기엔 사이즈가 너무 크구나 하고 한 발 물러나기. 그래, 우리 돈으로 사는 여행 말고  진짜 여행을 해보는 거야.  젊을 때처럼.


그래서, 갑자기 조지아를 생각해낸다.

이것이 과연 어떤 의식의 흐름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 본 조지아 사진 한 장에 내 마음은 떨렸었지.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정확히 떠오른 것이다.

터키 옆에 붙어 있는 조지아. 스위스 급 비주얼에 물가는 스위스 1/10 수준.  인류 최초의 와인 생산지. 구 소련의 흔적, 레트로 한 느낌, 때 묻지 않은 사람들과 자연환경.  그래 바로 이런 곳이었어. 우리가 2주 정도 머물면서 돈 생각 안 하고 맘 편히 쉬다 올 수 있는 곳. 게다가 5-6월은 조지아 여행하기 딱 좋은 계절이고 직항 편이 없어 국적기로 가지 못하니 마일리지를 사용할 수 없어 비행기 값이 좀 들긴 하지만 가서 아껴 쓰면 그래도 감당할 수 있을 수준이네. 라며 합리화한다.

나는 이제 조지아 여행 루트를 짜기 시작한다. 수도인 트빌리시에서 시작하여 근교 여행을 2-3일 하고, 카즈베기와 메스티아, 그리고 마지막엔 바쿠미에서 흑해에 뛰어들어 해수욕을 하자. 얼마나 완벽한 계획인가?

버스비 200원,  오이 다섯 개 150원, 토마토 한 무더기 300원. 막 이런 아름다운 물가와 함께 조지아 예찬이 담긴 블로거들의 여행기를 읽으니 지상 최대의 낙원은 조지아였던 것이다.

완벽해.

그럼 어떻게 가야 하나 비행기 표를 알아보자, 스카이스캐너를 돌리고, 각 항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최저가를 검색한다. 많이들 타는 카자흐스탄 국적기 에어아스타나 최저가 86만 원. 그런데 카자흐스탄은 뭔가 불안해, 게다가 올 때는 2회 경유.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환승 1회에 좀 더 믿을만한 비행기를 다 클릭해본다. 날짜 바꿔가며 수백 번 클릭하다가 카타르 에어 최저가 90만 원까지 검색 완료. 4월 7일까지 발권하면 할인된 가격에 탑승 가능. 이 정도면 쓸만해. 딸애랑 얘기해보고 당장 발권해야지. 하며 각종 조지아 사진을 보며 조지아를 여행한다. 음, 이제 관광지로 발전하고 있군, 그래 여기는 배낭여행 갔을 때 본 터키 동부의 느낌이야.  딱 내 스타일이네.  사기 택시와 관광지 호객꾼들이 생겨나고 있군, 뭐 그 정도도 다 괜찮은데 엇, 여기는 왜 길에 이렇게 개가 많냐? 그것도 사냥개 만한 개들이 온 동네에 계속 출몰, 뭐 사진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는데 여행 다녀온 사람들 후기를 읽으니 정말 동네마다 개들이 많다네. 목줄도 안 한 개들이 이렇게 다니면 나 무서운데 ㅜㅜ. 물론 순하다고는 쓰여 있으나 이렇게 돌아다니다 만난 개가 순하지 않으면 누가 책임질 거야? 이게 조금 걸린다. 게다가 도시마다 이동거리도 꽤 되는 게, 스멀스멀 옛 배낭여행의 기억이 떠오르네. 하아~ 이러고 다녀올 거 생각하니 좀 귀찮다. 그냥 지중해의 태양 아래 누워있고 싶다.


그래, 우리 8년 전 스페인 네르하에서 누워 있었던 게 딱 이맘때였지. 

정말 뜨거운 태양과 시원한 바람이 공존하는 휴양지였어. 숙박비도 비싸지 않았고, 기후도 너무 좋고, 그냥 딱 네르하에서 열흘만 있다 오면 좋겠다.

이번엔 네르하 항공권 검색, 자꾸 슬프게 최저가만 검색한다. 최저가를 찾다 찾으니 런던 경유, 마드리드, 네르하로 가는 편이 있네. 시간은 좀 걸리지만 우리 딸 영국에서 스탑오버하면서 해리포터도 보고,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도 다녀오고 한 일주일 영국 있다가 네르하에서 일주일 쉬고 오면 딱 좋겠네. 아. 이럼 점점 일이 커지는데. 영국에 스페인까지 커버하긴 힘들어. 바로 포기.

 

그냥 딱 지중해 느낌 나는 직항되는 데가 어디 있더라?

이번엔 크로아티아다! 그래 여기저기 다니면 경비가 계속 늘어나니 크로아티아에 집중하자 

직항은 좋은데, 비싸구나. 폴란드 항공으로 바르샤바 경유하면 90만 원.

폴란드도 안 가봤으니 괜찮다. 자그로브로 들어가 렌트해서 플리트비체, 스프린트, 두브로브니크에서 휴양하며 보내기. 괜찮다. 조지아처럼 덜 알려져서 정보 찾기 어렵지도 않고, 남들이 다 가는 코스이긴 하지만 일단 다들 좋다는 덴 이유가 있으니까. 물가는 조지아 보다 비싸지만 한 번쯤 해볼 만해.라고 생각하며 그래 크로아티아다!로 결론.

일단 직항 가격은 이미 너무 올라 버렸으니, 경유 가격 적당한 폴란드 항공은 어떤가 좀 볼까? 하고 검색해보니 아니 왜 폴란드 항공은 연관검색어가 수하물 분실이지? 하아~ 폴란드 항공은 수하물을 분실이 잦구나, 경유 시간이 촉박하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는데, 하아~ 우리 경유 시간 1시간 15분이네? 괜찮을까? 뭐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라며 결제 해 말아 클릭하기 일보직전, 문득 든 생각.


아 이 죽일 놈의 정보의 바다.

내가 언제부터 여행 가면서 이렇게 온갖 것을 다 찾아보고, 만반의 준비와 걱정을 함께 해서 떠났더냐!

어떻게 좀 다녀올 수 있을까 싶은 여유만 생기면 이번엔 여기 나중엔 여기 항공권 결제. 항공사 후기 그런 거보다 최저가가 중요했고, 하루라도 오래 있다 올 수 있는 스케줄을 찾았지 무슨 항공사 서비스에 경유 시 라운지 가능 여부까지 견줘보고 있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여행책 한 권에 호텔도 예약 없이 새벽에 요르단 공항에 떨어져 아무 계획도 없이 터키,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무사히 여행했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왜, 도대체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걱정이 많고, 이렇게 챙길 게 많고, 이렇게 걸리는 게 많고, 게다가 경제적 여유도 없어서 비행기 발권조차 못하며 모바일로만 세상을 여행하고 있는 건가?

거기에 또 이미 너무나 보고, 또 봐서 나는 이미 다낭, 하와이, 조지아, 크로아티를 다녀온 것 같네? 이거 무슨 여행지 사진 확인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여긴 이래서 저긴 저래서 삼일 밤동안 모바일로 세계 여행을 하고 보니, 이러나저러나 짐 싸서 갈 생각도 귀찮은 마음이 자꾸 들고, 다녀와서 빨래에, 어차피 5-6월이면 우리나라도 날씨 좋은데, 경주나 다녀올까, 차 렌트도 안 해도 되고, 우리 차 가지고 가서 그냥 발길 닿는 데로 다니다가 바다에 가서 해수욕도 하고 맛있는 것 왕창 먹고 오지 뭐. 그리고 다음 여행 대비 적금을 들어서 다음엔 돈 때문에 자꾸 포기하지 말고 딸내미 중학교 되기 전에 우리 가족 다 같이 근사한 곳에 다녀오자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어젯밤, 남편 딸과 둘러앉아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앉아 도란도란 자신이 생각하는 꿈의 여행지를 꼽아 봤다. 딸애는 무조건 하와이, 남편은 아직다 못 가본 유럽에 미련이 남아 이탈리아, 나는 그냥 혼자 가게 해주면 안 될까? 이런 얘기들을 하며, 다음번 우리 가족의 완벽한 여행지는 과연 어디로 선정될지, 기대되는 바이다.


덧,

누가 해외에서 나 좀 초대해주면 안 되겠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녀올 텐데.

 예전 같았으면 갈 이유를 백 개는 찾았을 이 시점에 이렇게 쉽게 안 갈 이유를 찾아내는 내가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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