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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Apr 11. 2019

식탁 일기 - 스터디 카페, 도시락,  예술과 허세

feat. <나의 작은 시인에게>, <여름, 스피드>

일주일에 한 번, 딸의 등교 준비와 함께 나의 도시락을 싼다.

보온 도시락에 저녁에 남은 반찬을 담고 따뜻한 커피와 노트북, 읽을 책 몇 권을 넣고 동네 스터디 카페로 향한다.

가방엔 노트북에 책에 도시락에 커피까지 되게 무거운데, 이때 아니면 걸을 시간이 없다며 1.7 km 약 2500보를 걸으면 도착하는 스터디 카페.

굳이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도시락에 커피에 노트북에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것도 그렇고, 버스 타면 두 정거장이면 될 거리인데 뚜벅뚜벅 꼭 걸어서 가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가열차게 스터디 카페에 출근해서 한다는 것이 고작 도시락 먹고 일기 쓰기라 한다면 그걸 왜 굳이 꼭 거기서?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사실  나도 잠이 덜 깬 상태에 아침마다 이걸 가 말아? 하는 고민을 하는 것도 매일이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으며 도시락을 왜 꼭 싸서? 왕복 걷기에 노트북 무겁기도 하고 집에서 쓰는 게 경제적인데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니까.

사실 브런치에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땐, 우리 집 식탁에서도 시시때때로 내가 뭐라도 쓰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건만 우리 집 식탁이라는 것은 일상의 주는 편안함과 함께 여러 가지 유혹과 번잡함이 혼재해 있는 카오스 같은 곳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물론 모두가 잠든 밤이나 가족들 모두 나간 시간은 매우 호젓하고 뭔가를 쓰기에 꽤 매력적인 곳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집 식탁 옆엔 소파도 있고 침대도 있다는 사실.

나는 너무 자주 피곤하고, 너무 자주 눕고 싶고, 너무 자주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만 몇 시간이라도 ‘집중’ 하기 위해 찾은 스터디 카페.

집 앞에 새로 생긴 스터디 카페는 정말로 신세계였다.

“ 니가 공부할 의지만 있으면 꼭 그렇게 돈 내고 독서실까지 가서 공부해야 해?” 하는 엄마 목소리 기억 저편에서 떠오르며 나란 인간은 돈을 내야 의지가 생기는 부류였다는 것을 깨달은 바 두 시간에 오천 원, 네 시간에 육천 원에 이런 호사라니.


이쯤에서 잠시 지나간 도서관의 기억들을 추억해보자면 

중고등 시절 나는 공부를 진짜 열심히 하는 우리 학교 전교 1등과 친했다. 이 친구는 그 어린 시절에 어쩜 그리 철이 빨리 들어 시험기간에 밤을 새워 공부를 했던가?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로 기특한 나의 친구 J. J는 나에게 시험기간이 있는 주말이면 고덕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자고 했다. 커다란 열람실이 있는 고덕 도서관은 당시 우리 동네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전부 모이는 핫 플레이스였는데, 그 시절에 공부하고 싶었던 학생들은 왜 그렇게 많았던지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줄 서서 도서관 앞에서 대기표 받고 기다려야 입장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밤 새 공부하는 내 친구는 아침잠도 없는지 늘 주말에 도서관 문 열자마자 입장해야 한다고 나를 달달 볶던 J.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아침잠이 많았고, J는 아침 일찍부터 나를 깨우러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고 눈도 못 뜨는 나를 공부시키겠다고 도서관으로 데려갔었다. 친구의 그 정도 정성이면 나도 친구와 함께 1,2등은 주고받았어야 했는데 , 사실 안 간다면 그만 이었겠지만 공부도 안 하면서 고덕 도서관에 갈 만한 이유가 나에게도 있었으니 고덕 도서관엔 500원(?) 짜리 우동과 어마어마한 서가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배가 고플 때쯤 엄마가 싸준 도시락에 따뜻한 우동을 하나 시켜 고춧가루 넣고 점심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게 됐고, 잔뜩 먹고 배가 불러 식곤증이 밀려오면 나는 1층 서가로 내려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재미있고 야한 소설책들을 찾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서가 구석에서 김홍신의 인간시장을 읽으며 나는 얼마나 심장이 콩닥콩닥 했던가.


그 후, 고3 때는 나름 수험생이라고 독서실을 다녔다.

한 달에 얼마 이렇게 정액권을 끊고, 학교가 끝나면 거기서 공부하다 집에 오는 시스템이었는데.

그 시절 나는 왜 이렇게 밤잠도 많았는지 저녁 먹고 의자에 앉기만 하면 늘 잠이 밀려오고 그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침을 잔뜩 흘리며 꿀잠을 자곤 했었다.  한 참 자고 일어나면 친구들이 붙여 놓은 포스트잇에 “또 자냐?”,”일어나!”,”나 너무 졸려서 집에 간다.” 뭐  이런 얘기들이 적혀 있었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3 수험생 시절도 지나고 보니 귀여운 시절이었다.


대학 때 우리의 아지트는 도서관 열람실이 아닌 도서관 뒤뜰이었다. 

도서관 뒤뜰은 도서관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 잔디와 등나무가 있는 작고 아담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때 왜 여기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싶었을까? 학교 메인 통로와는 떨어져 있어 살짝 외진 여기는 뭔가 아지트 같은 분위기도 있고, 다른 사람 눈에 띄지도 않는 곳이어서 우리는 여기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대학 가면 다들 그러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는데 학교 다니는 내내 그런 학생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우리는 삼겹살을 구워 먹겠다고 이스트팩에 돌판을 넣고 그 높은 언덕을 올라 도서관 뒤뜰에서 삼겹살을 먹고 시를 이야기했던가? 말았던가?


그리고 한 이십 년 만에 내 발로 찾아간 스터디 카페.

내가 나이를 먹은 만큼 독서실은 이렇게 진화했구나.

답답한 독서실 책상도 없고, 은은한 조명에, 깔끔한 카페 분위기, 공부 잘 되라고 백색 소음을 들려주고, 각종 편의용품까지 제공하는 이 곳에서  공무원 시험공부하고, 수능 문제집 푸는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일기를 쓴다. 무슨 대단한 일기를 쓴다고 굳이,라고 말하면 그도 역시 맞는 말이지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애를 학교에 보내고 가방을 둘러메고 나와 여기 앉아 있는 내가 맘에 들어서이다.

지난 1월 11일부터 시작했으니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핑계로 뭔가 쓰기 시작한 지 4개월째.

대단한 걸 쓰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쓰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매일 반복적인 일상에서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뭔가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각성이 없다면 어떤 소중한 시간도 그저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리라. 봄꽃이 만발하는 4월의 오후도, 친구와의 신나는 수다도, 책은 그저 읽어 버리고, 영화도 봐버리고 말았을 뿐인데 이젠 뭔가 보고  느끼고 읽으면 다시 생각해보고 이야기를 만들어 본다. 물론 마감 기한도 없고, 어마어마한 독자도 없는 이 마당에 사실 안 써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데 왜 굳이?라고 묻는다면 이건 올해 들어 한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고, 나라는 인간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의지를 가지고 약속을 지킬지 시험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 중의 구절을 빌려보자면

나는 그를 만나고 난 이후로 글을 쓰기보다 그저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을 느낀다. 점점 나이브 해지는 나의 모습에 ‘ 삶은 예슬보다 언제나 큰 법이지’와 같은 말로 행복한 삶이 더 우산이라 자위해보기도 한다. 욕심을 부려가며 이만큼 배웠으면 되는 거 아닐까? 고급 독자, 아니 예술이라는 게 좋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자문은 수도 없이 해보았다. 한편, “불행한 삶을 사는 대신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갖길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하는 문학 선생님의 말에 망설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던 예전의 나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몇 년간 같이 습작을 해온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우리가 예술이랍시고 하는 거, 그거 면봉이나 이쑤시개 만드는 것보다 세상에 하등 쓸모없는 일일지도 몰라.” 나는 맞아 맞아 맞장구를 쳤고,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내팽개치고 우리를 더 불행한 사람으로 포장할 것들을 끌어왔다. 그러나 그 친구도 나도 안다. 우리가 모든 기회비용을 내팽개치고 몰두한 비생산적인 공부와 창작활동이 무엇보다 좋은 것이라는 걸. 그것을 세상에 내어놓지도 못하고, 내어놓은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고 만들고, 글을 쓰는 행위가 이제는 삶을 살아가는 한 수행 방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아주 저렴한 비용에 행복해질 방법을 아는 사람일지도.    < 여름 스피드  중, AUTO>  


사실, 내가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하루 네 시간 오천 원을 지불하고 뭔가 쓰고, 스스로 성찰하는 이 시간이 비록 비생산적인 공부와 창작활동일지라도 누구보다 저렴한 비용에 행복해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꽤 괜찮은 기분이랄까? (나는 소박하니까 ^^)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를 보며 비생산적인 공부와 창작활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유치원 교사인 주인공 리사는 아들딸 다 키우고,  안정적인 가정을 가진  중년 여성이다. 다 가진 것 같은 그녀에게 없는 것이 있었으니 예술을 사랑해 시를 쓰고 싶지만 시인의 재능이 그녀에겐 없었던 것. 평생 교육원에 다니며 시 작법을 배우고 쓰기도 하지만 그녀의 시는 평범하기만 하다. 그러다 유치원 자신의 반 아이 다섯 살 지미의 시를  듣고 지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녀는 지미의 천재성을 질투하기도 하지만 지미의 시를 지켜주기 위해 상식을 뛰어넘는 방법도 무릅쓴다. “ 세상에 사라져 가는 시를 지키기 위한 극한의 필살기”라 쓰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지만 이미 시가 사라진 세상에서 시를 지키기 위해선 제정신으로 살 수는 없다는 사실, “예술”과 “현실”을 적당히 조율하며 삶을 풍요롭게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화의 마지막, 지미가 떠올린 시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리사에게 ‘당신이 무슨 예술을 한다고! 당신은 예술을 하고 싶은 허세 덩어리에 지나지 않아.” 란 말처럼 나의 스터디 카페에서 일기 쓰기도 사실 허세일 수 있겠지만 뭐 이렇게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는 허세란 나의 자존감을 세워주기도 한다며. 어차피 인간은 허세 없이 살 수가 없는 것을.


덧, 그런데 도시락은 왜 그렇게 꼭 싸가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굳이 보온도시락을 커피는 텀블러에 내려서.

그건 어딜 가도 잘생긴 남자애를 먼저 찾아 두고 그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이틴 시절처럼 어디 가서라도 즐거워할 뭔가를 마련해야하기 때문이지요. 신나게 2500보를 걷고 가서 일기를 쓰다가 “ 아 이따가 점심엔 김치찌개를 싸왔지, 베이컨을 구워왔지, 샌드위치를 커피랑 먹을 수 있어.” 하고 생각하다 보면 그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어쩌면 도시락 뚜껑을 여는 그 순간이 스터디 카페에 온 이유이자 목적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렇게 혼자 앉아서 도시락을 먹는 것은 또 얼마나 꿀맛인지. 물론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어제저녁에 먹다가 애매하게 남은 반찬을 처리할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장점도 있지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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