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나무 식탁 Apr 16. 2019

식탁 일기 - 너랑 절교할 거야

아직 미혼이고 젊은 지인이 얼마 전에 아주 친했던 누군가와 절교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랫동안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말을 옮기고 다니고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해서 이제 만나지 않기로 했다고. 오는 전화도 받지 않고, 전화번호도 삭제를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며 그러나 당장 이번 주말에도 그 절교한 친구와 약속을 잡아놨는데 당장 그 약속도 없으니 이제 뭔가 또 다른 일을 만들어야 한다고.     

‘절교’라....

딸애가 2학년 때 반에서는 절교가 유행이었다. 아홉 살 어린것들이 두루두루 친하게 놀지 않고 절교라니 그러면 못써라고 하고 그 양상을 들여다보니 절교는 이런 것이었다. 오늘  A가 나에게 기분 나쁜 말을 했다. 그러면 절교! 그리고 내일은 상냥하게 대했다 그러면 친구, 내일 또 맘에 안 들면 절교! 뭐 한 이삼 일씩 말하지 않고 절교를 이어나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 유행인 절교는 이렇게 여기저기 남발되며 절교인 듯 절교 아닌 선언이 돼있었다.

지인의 절교 얘기를 듣고 신선한 충격이 든 것은 나야말로 절교를 해본 적이 너무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위 지인들의 면면을 돌아보며 과연 나에겐 절교를 선언할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해본다. 대외적으로 보면 성격 좋아 보이긴 하지만  오래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이고 보니 거기서 절교를 한다면 정말 남는 사람이 몇 안 될 수도 있다.  최근 십 년 간 누군가와 절교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나 생각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물론 나도 인간인지라 문득문득 서운하고,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인연들을 끊어야 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게다가 그 인연들 때문에 절교를 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 쓸 일이 생긴 적도 없다. 내가 이렇게나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이다 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제 서로 참지 못할 만한 사람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났다는 얘기다. 잘 맞는 줄 알았는데 사귀어 보니 서로 너무 다르고, 맞춰 주기도 힘들고 맞춰주기 싫은 사람들은 굳이 “절교”를 선언하지 않아도 모두 다 알아서 떠나고, 사정이 이러다 보니 굳이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데 열을 올리지도 않는다. 내 옆에 남아 있는 것은 그러려니 하고 서로 이해하고 딱히 서로 기대하지 않는 무덤덤한 선후배와 친구들만 남아 그저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참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반전은 나는 가끔 누군가와 절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 대상은 이런 지인들이 아니라 나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남편, 딸, 엄마 뭐 이런 나의 소중한 가족들과 가끔 나는 절교하고 싶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서로 증오하며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다는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의 평온한 일상에 절교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주는 대상은 이제 가족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니.

예를 들면,

열두 살 먹은 딸이 왜 엄마 마음만 있고 내 맘은 없냐고 입바른 소리 할 때.

그리고선 뱀 허물 벗듯 옷을 벗어던지고 등교한 딸애 방을 볼 때.

자기 물건 어디다 둔 지 기억 못 하고, 울며불며 찾고 있는 딸을 볼 때.  

세 식구 외식인데 메뉴 다섯 개를 시키며 배 고픈데 왜 더 못 시키게 하냐고 진심으로 화를 내는 남편을 볼 때.

새벽에 배고파 라면을 두 개  끓인 남편이 가스레인지 주변에 다 튀긴 수프 가루를 그대로 두고, 면을 반은 남긴 채 냄비를 개수대에 넣어 둔 것을 발견할 때.

너무 기분 좋게 취하고 들어와 굳이 곤히 자고 있는 나를 깨워 무슨 얘기든 하고야 마는 남편을 볼 때,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탄다며 그날 아침에 들어와 눈에 보이는 것만 가방에 담아 쓸어 가는 남편이 비행기를 제대로 탔나 마나 조마조마하는 나를 볼 때.

쓰다 보니 가족 뒷담화가 되고 말았으나 이럴 때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 아 진짜 남편만 아니면, 아 진짜 딸만 아니면”

이렇게 취향도 안 맞고 다른데 같이 살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연유이며 남이었으면 진작에 안 볼 이유가 백가지는 됐을 텐데 남이 아니어서 절교 선언을 할 수 도 없는 아이러니라니.

(물론 그들도 나에게 이런 생각을 하리라 엄마만 아니면, 부인만 아니면)

그렇게 순간순간 욱 하다가도 자잘한 일상들 사이에 남편과 딸에게 할 절교선언은 잊히고 때론 세상 행복한 가족처럼 때론 서로에게 질려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남편과 한창 싸우던 신혼 때, “지금 이기지 않으면 평생 지는 거야!”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우리는 서로에게 엄청나게 잔인하게 굴었는데, 그때 들었던 생각이 바로 이거였다. “남친이었으면 헤어지면 되는걸 왜 결혼은 해가지고”  남친이었으면 안 만나면 깔끔하고 속 시원한 일인 것을 왜 일가친척 친구들은 다 모아다가 식은 올리고, 사진은 찍고, 신혼여행 은 가서 이제 와서 무르면 내 꼴은 뭐가 될까 하는 오만가지 생각과 함께 이 끊을 수도 없는 질긴 인연을 어쩜 그렇게 쉽게 만들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당장 이혼하기도 면목 없고, 서로 잘한 것도 없고,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찌 이렇게 결혼한 지 12년 차가 되어 살고 있지만  결혼은 선택이라지만 지금 돌아보니 운명이었고, 부모 자식 간도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니 가족이란 참 질긴 운명의 공동체구나 싶다.

이쯤 되니 어쩌면  절교란 그나마 풍성한 인간관계에서나 시도해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제 정말 지킬 것은 가족과 몇몇 절친밖에 안 되는 나의 인간관계에선 “절교”를 질러볼 사건도 대상을 찾기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인간관계에서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것 같다.         


덧, 오늘은 영 써지지가 않아서 시작 4개월 만에 소재 고갈로 안 써도 될 얘기를 듣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 굳이 쓰고 있는 찜찜한 기분이 계속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주는 뭔가를 쓸 수 있는 날이 오늘 밖에 없어서 굳이 오늘 뭐라도 써야 하기 때문에 맘에 들지 않지만 일단 쓰는데 의의를 둔 게 사실이다. 이쯤 되면 ‘절필’을 선언해야 되는 게 아니냐 생각도 들지만 이곳은 정말 사적이고 살짝 공적인지라 두서없이 일단 적어 보는 것이다. 사실, ‘절필’ 선언이라도 할 만큼 쓰는 작가들은 얼마나 대단한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절교도 못하고 절필도 못한다.     

작가의 이전글 식탁 일기 - 스터디 카페, 도시락, 예술과 허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