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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Apr 25. 2019

식탁 일기 - 우주의 기운을 거슬러

물기를 잔뜩 머금은 목요일 아침. 

오늘은 나의 식탁에서 쓴다. 날씨 때문인지 부랴부랴 싸 짊어지고 나갈 에너지가 없는 지라. 아무래도 오늘 써야 할 에너지는 지난 일주일 간의 맘고생으로 다 써버린 게 아닐까 싶다.

6개월간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고, 목표에 도달하고, 아 이제 됐다, 싶을 때, 원하는 결과를  얻었으나 온 우주의 기운이 다 몰려들어 그것을 방해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한 일주일이었다.

내가 아니라 남편에게.

남편이 지난 반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았기에, 주말도 쉬지 못한 채 어떻게 존버 했는지를 옆에서 보고 이제 축배만 올리면 됐었는데, 사람의 일이란 정말 이렇게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 하필이면 그때에 터지고, 이거 무슨 영화 찍는 거냐 싶은 소문들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도 보고,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관계 속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어쨌든 결론은 아쉽지만 그동안 수고했으니 됐다.로 정리된 그간의 상황들.

그간의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해 들으면서 나는 분노했고,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을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명백한 승률을 손에 넣고도, 이제 됐다고, 왜 하필 우리에게, 어쩌다가.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 했어? 화라도 좀 내고 오지? 

평소 남편의 성격을 알기에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한다고 풀리는 게 아니란 걸 알기에 좀 지르고 할 말 다 하고 오길 내심 바랬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일단 지르고, 감정 다 상하고 나면 그 후를 기약하기 힘들기에 일단 받아들였다고 한다. 본인과 딸린 식구들을 위해서.

화도 안 내고 왔구나.

어디 가서 하소연이라도 하면 덜 억울할 텐데, 노력한 만큼 다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우리가 무슨 요행을 바란 것도 아니고 이제까지 들인 공이 얼만데 그걸 이렇게 뺏나?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드디어 알았다.

나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서, 집안일을 하면서도 자꾸만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인데 남편은 오죽할까. 정말 정이 똑 떨어졌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질도 한 번 못 내보고 속이 새까맣게 탔겠지.

자꾸 딴생각이 드니 책을 들어도 읽히지 않고, 누워 있어도 앉아 있어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무엇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그저 잡생각을 좀 멈추고 싶어 집어 든 이석원의 책을 읽다가, 문득 나의 억울함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래, 세상에 어디 억울한 게 우리뿐이었나. 이렇게 수많은 억울한 죽음들과 사건 사고 속에서 그저 한 만큼 되받지 못했다고 억울함 운운한다면 그건 너무 팔자 좋은 얘기라는 걸 그제야 눈치챈다. 내 안의 문제에 골몰할 땐 보이지 않던 것이 한 걸음 떨어져 보니 보이는 것이다.

분노와 억울함의 쳇바퀴를 돌며 일주일간 갈팡질팡 했던 건 사실 내가 들인 공만큼 되받지 못했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늘 우리는 남들은 들인 공도 없이 큰 것을 가져간다고 생각되니 말이다. 사실 들인 공만큼 가져가는 공평한 세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되는 사람은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 것도, 열심히 노력해서가 전부가 아니란 것도, 이게 운명인지 사주인지 팔자인지를 떠나 그저 살면서 겪어야 할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인 것을 말이다.

아빠, 그럼 우리 이제 어떡해? 

딸애가 걱정을 한다.

음, 뭐 기분이 좋지 않고, 화도 나지만 이게 열심히 한다고 다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것은 아니야. 봐라. 딸아, 아빠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보여줄게.  


겉으로 남편은 씩씩하다. 다행이다.

물론 그래서 씩씩하게 소파에 누워있지만.

최선을 다 했고, 본인 스스로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니 억울하긴 할지언정 후회되지는 않는 것이라 짐작한다.

억울함은 풀자, 세상의 억울함 들은 이미 포화상태인 것을 우리의 억울함까지 더 하기엔 신께서 하실 일이 너무 많다. 마음에 묵혀 둬 봤자 돌아오는 것은 화병밖에 되지 않는 일.

신께서 우리에게 운은 주지 않았을지 몰라도, 다행히 우리의 의지까진 뺏지 못했고,

그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덧.

“ 나 자신보다 더 두려운 건 없다오. 내 오른쪽 눈은 용이고 왼쪽 눈은 범이거든. 혀 밑에는 도끼를 간직했고 굽은 팔은 활처럼 생겼지요. 내 마음을 잘 가지면 어린아이처럼 착해지지만, 까딱 잘못하면 오랑캐도 될 수 있다오. 삼가지 못하면 장차 제 스스로 물고, 뜯고, 끊고 망칠 수도 있는 거지요. 그래서 옛 성인의 말씀 가운데도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여 예법으로 돌아간다는(<논어>에 나오는 말로 극기복례라고 함) 고 하였고 ,’ 사심을 막고 참된 마음을 지닌다(<주역>에 나오는 말로 폐사 존성이라 하였지요. 성인께서도 스스로를 두려워하신 거라오,”                                       

 -  지난주 읽던 박지원, <민웅전> 중 구절.

   이러려고 읽었나,  나중 또 어느날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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